늘보의 뉴욕 행

 

딸의 어릴 적 별명은 늘보였다. 우연히 늘보 인형을 보고 귀여운 생각에 사 주었는데, 아이가 특별히 좋아하여 항상 가지고 놀기에 장난삼아 늘보라고 부르곤 했다. 별명 때문이었을까, 아이는 매사에 느긋하여 급한 걸 몰랐다. 모든 부모가 첫 아이에게 가지는 기대가 남다르듯이 나 또한 첫딸에 갖는 기대가 컸으나 갈수록 보통 아이임을 통감해야 했다. 성질 급한 나는 답답함에 분통이 터질 일도 많았다.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부터 미국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그때 담임선생님이 주신 프린트 물에 들어있는 시를 읽고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오래전 일이라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략 다음의 내용이다.

 

나비들이 하늘을 난다

높이 나는 나비

낮게 나는 나비

모두 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그대는 왜 높이 나는 나비만 아름답다 하는가

 

이민의 외로움에 미국 온 걸 가끔 후회할 때에도, 모든 것을 빨리빨리 잘 하는 1등만 알아주는 경쟁 심한 한국 사회에서 늘보 딸이 얼마나 힘들고 스트레스 받았을까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하곤 했다. 단점을 탓하기 보다는 장점을 칭찬해 주는 미국 교육 환경에 딸아이가 맞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늘보 딸이 방학 중 인턴으로 뉴욕에 간단다. 허스트(Hearst)에서 두 달간 일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인터넷을 검색해 보고야 허스트가 허스트캐슬의 허스트이며, 신문, 잡지, 방송 등 미디어로 유명한 회사임을 알았다.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대충 그림만 훑어보던 온갖 종류의 잡지들이 모두 그곳에서 발행된다니 놀랐다. 혼자 힘으로 포트폴리오를 내고 인터뷰하여 두 명만 뽑는 인턴이 되었다니 대견하고 기뻤다. 마치 세계적인 회사에 취직된 양 한국 가족들에게 전화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몇 년 전 본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처럼 아침부터 커피와 베이글 심부름이나 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영화의 주인공처럼 촌닭 취급을 받으면 곤란 하지 싶어 동네 백화점을 두고 멀리 베버리센터와 싸우스코스트플라자에 가서 구두와 옷가지를 쇼핑하며 뉴욕갈 준비를 도왔다.

 

다음은 2개월 머물 곳을 정해야 했다. 첫 손녀에 대한 정이 각별하신 한국의 친정 엄마는 회사 근처에 스튜디오를 얻어주면 당신이 뉴욕에 와서 아이 밥 해주며 같이 지내시겠다고 하셨다. 여동생 얘기로는 엄마가 벌써 딸아이 뉴욕 생활비 모금운동까지 시작하셨단다. 정말 살인적인 뉴욕 물가였다. 아무리 아이에 대한 투자라지만 독채는 너무 비싸 휴가 가는 사람이 놓는 방 하나 룸메이트를 찾아 보았다. 인터넷으로 찾는 것이라 쉽지 않았다. 결국은 날짜가 안맞아 중간에 한 번 옯겨야 하는 곳으로 정할 수 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5층 이라는데 무거운 트렁크를 끙끙거리며 들고 올라간다고 생각하니 내 팔이 아픈 것 같았다. “밥은 먹었니? 돈 안 떨어졌어?” 라고 전화 하면, “엄마, 제발 중요하지 않은 일로 전화 하지 마.”하고 쌀쌀 맞은 대답만 돌아오니 서운하다. 덥고 끈끈한 뉴욕 날씨도 짜증 날 터이고 지하철 두 번씩 갈아타면서 뾰족구두 신고 회사 출퇴근 하려면 힘도 들겠지 싶어 날카로워진 아이를 이해한다.

 

어느새 집을 옮겨야 할 때가 되었다. 캘리포니아로 3주간 여행가는 자매가 개를 돌보아주는 조건으로 방 두 개짜리 독채를 싸게 빌려 준다는 소식이다. 평소에 개를 기르고 싶어 하던 아이는 개와 함께 센트럴파크에 산책하러 갈 기대에 차있다.

 

미술관을 순례하고 브로드웨이 뮤지컬도 두 개나 보았다며, 나름 뉴욕 생활을 즐기는 눈치다. 개가 아직 어려서 똥오줌을 못가리는게 힘들고 일마치고 집에 오면 피곤하여 쉬고 싶은데 개가 너무 달려들어 귀찮을 때가 많다고 불평한다. 부엌 싱크대에서 개 목욕 시키는 것은 이제 일도 아니라나. 남들이 예쁜 강아지랑 한가롭게 지내는 모습에서 개를 키우고 싶어 했겠지. 모든 일의 이면에는 항상 귀찮은 책임이 따름을 이번에 느꼈겠지, 결코 녹록치 않은 것이 인생임을.

 

딸이라면 끔찍이 여기는 남편이 며칠 짬을 내서 뉴욕을 다녀왔다. 복잡한 대도시에서 잘 적응하여 살고 있다며 뿌듯해한다. 세계 어디에 떨어뜨려 놓아도 잘 살거라나. 아이가 늘보처럼 느긋하고 답답한 것이 아빠 닮아 그렇다고 종종 탓하던 나를 보란 듯이 면박 준다. 얼마나 빠릿빠릿해졌는지 놀랐다나.

 

늘보라고 걱정하던 딸이 어느새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높게는 아니지만 낮게라도 꾸준히 날면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조급하게 굴지 말고, 조용히 응원하며 기다려야지. 늘보 만세!

 

 

   2010년, 재미수필 12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