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배낭

 

 

최숙희

 

 

 

 

LA도심에 비가 오면 산에는 눈이 내린다. 올해는 유독 비가 많아 홍수주의보가 발령되고 침수피해가 속출한다는 뉴스를 접하지만 프리웨이를 운전하며 멀리 눈 덮인 산을 보면 가슴은 기대감으로 콩닥콩닥 뛴다.

 

 

나뭇가지마다 내린 눈이 얼어 하얀 눈꽃으로 피어난 장관은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울 텐데, 내가 갈 때까지 제발 녹지 마라 당부한다. 코끝에 감도는 알싸한 공기를 가르며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걸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연이은 겨울 산행으로 꼬질꼬질 때가 낀 배낭을 보니 아름다운 설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싶었다. 무심코 세탁기에 집어 넣었다. 작년에 이사하며 개비한 프론트로드 세탁기도 나를 부추겼다. 예전에 쓰던 탑로드 통돌이 세탁기에 비해 세탁물 엉킴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등산, 캠핑용품 정리는 남편이 항상 해와서 내가 배낭을 빨아본 적이 없는데, 하필이면 내가 처음으로 세탁기로 시도한 날 문제가 생겼다. 배낭 한 쪽 옆선이 너덜너덜 처참하게 찢어진 것이다. 하이킹 도중 등에 땀이 차지 않도록 등판에 덧댄 그물망이 철사로 연결된 것을 미처 생각 못했다. 세척도중 철사가 튀어나와 옆선을 찢어 놓았다. 6년째 썼으나 너무 말짱해서 앞으로 10년 이상은 너끈히 쓸 수 있는 것을 내 실수로 못쓰게 되니 배낭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침문의 유 씨 부인이 바늘을 부러뜨리고 '오호통재'라 한 것이 백퍼센트 이해되었다.

 

 

배낭이 아깝기도 했지만 갑자기 왜 안하던 짓을 했냐고 잔소리 작렬일 남편이 더 신경 쓰였다. 남편 모르게 같은 것을 구입해 완전범죄를 만들 생각에 인터넷을 찾아보았지만 같은 색상은 이미 생산이 중단된 상태였다. 대신 ‘Osprey : All mighty guarantee’를 발견했다. 회사 창립연도인 1974년에 구입한 것이든 어제 산 것이든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손상된 것을 무료로 수리해 주거나 수리를 못할 시에는 새 것으로 교환해준다는 회사의 약속이다.

 

망가진 배낭을 포장해서 회사에 보내니 며칠 뒤 '고객 서비스'라면서 전화가 왔다. 배낭수선이 불가해서 새 것을 보내줄 테니 가까운 가게에 가서 메어보고 체형에 맞는 모델과 색상을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다. 내가 원하는 새 배낭이 도착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성 싶은 일이다. 깜짝 놀랐다. 

 

 

한 번 생산한 제품을 끝까지 책임지는 회사의 방침은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준다. 자기 상품에 대한 자신감이 얼마나 크면 이렇게 까지 할 수 있을까. 제품이 망가졌을 때 새로 구입을 해야 매출신장으로 기업이 성장하는 근시안적 사고가 아니다. 브랜드 이미지를 추구하는 큰 그림을 그리는 사업이다. 헌 것을 쉽게 버리고 새로 사는 풍조가 만연하는 요즘 쓰레기문제로 신음하는 지구를 구하자는 재활용 운동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습관 때문인지 미국에 살다보면 더딘 일처리에 갑갑함을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느려도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기업을 만날 때이다. 소비자에게 무한 신뢰를 주고 미국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기업이다.

 

 

몇 달 전 캠핑에서 캠프파이어 도중 파카에 불씨가 튀어 구멍이 나서 털이 자꾸 빠지는 것을 막으려 대일밴드를 붙여두었는데, 그 회사도 평생 워런티 프로그램이 있으려나

 

미주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9/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