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하게 보낸 어느 날

 

 

 

 

점심을 먹은 후 깜박 졸았나 보다. 언제 가게로 들어왔는지 모르는 건장한 체격의 여자가 마네킹 하나를 들고 계산대 옆에 서있다. 마네킹이 쓰고 있는 가발을 빨간색으로 달라고 한다. 재고가 마침 없어 주문해준다고 했으나 내일 아침까지 당장 필요하단다. 그녀의 커다란 숄더백 지퍼가 열려 있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장미문신이 요란한 팔과 야한 옷차림이 신경을 거스른다. 마리화나를 피운 듯 냄새도 난다. 혹시나 해서 가게 뒤편으로 가보니 가발이 벗겨진 마네킹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 가발을 훔쳐 가방에 넣은 후 평범하지 않은 빨간색 가발을 달라고 한 것이다. 인터넷 때문에 소매경기가 가뜩이나 안 좋은데 도둑까지 맞기는 싫었다.

 

유유히 나가는 그녀를 불러 세웠으나 그녀는 일행이 타고 있는 차로 뛰어간다. 시끄러운 분위기에 놀란 남편이 쫒아나간다. 열린 차창을 붙들고 돈을 지불하든지 물건을 내 놓으라고 말을 하는가 보다. 차에서 기다리던 일행이 시동을 건다.

 

뒤따라 나간 나는 남편에게 그냥 보내주자고 말했다. 수 년 전 소다 하나를 훔쳐 달아나는 청년을 제지하다가, 범인이 쏜 총을 맞고 사망한 한인 리커스토어 업주가 생각난 것이다.

 

“전화기로 차 사진이라도 찍지 그랬어.” 남편이 말한다. “사진 찍었다가 혹시 총이라도 있으면 어떡해. 차량 번호는 외웠어.”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미 전역에서 벌어지는 총기사고에 생각이 미치니 아찔하다.

 

독립기념일 연휴에 맘모스로 캠핑을 가면서 랭카스터부근 월마트에 들렀다. 얼음직벽을 올라갈 때 아무래도 헬멧이 있어야겠기에 사려고 간 것이다. 스포츠용품 코너를 둘러보다 총을 파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기를 지켜준다는 뜻의 셀프 디펜더(Self Defender)라고 쓰인 권총이 고작 $49.99에 진열돼 있었다. 자물쇠로 잠긴 유리장 속에 있고 신원조회를 통해 판매되겠지만, 전국적인 소매체인에서 이렇게 쉽게 총을 구할 수 있는 줄은 몰랐다.

 

총으로 무장하여 자기방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인 광고인이 상을 탔다고 하여 주의 깊게 보았던, 적을 겨냥한 병사의 총구가 결국 자신을 쏘게 된다는 반전 포스터 `What goes around comes around.(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역설의 이미지를 잘 표현했다. 엄격한 총기규제법이 있어도 인터넷을 통한 불법 총기유통까지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 총기 협회의 지속적인 막강 로비에 번번이 무산되는 총기규제법이 안타깝다.

 

“가발 하나 찾으려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자동차 창문은 왜 붙들고 있었어. 가게를 송두리째 훔쳐 달아난다고 해도 당신의 안전이랑 바꿀까.” 나의 아부성 멘트에 남편이 피식 웃는다. 아직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가게로 들어가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머쓱해진 그가 손을 뺀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디서 왔는지 조각구름 하나가 바쁜 듯 씩씩하게 흘러간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겠지. “오늘은 무사했네.” 안도의 한숨을 쉰다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09/12/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