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이리나

 

컴퓨터를 켰다. 아가도 천사도 잠이 든 이 밤에 왜 나는 깨어있는가. 며칠 피곤이 겹쳐서 낮잠을 잔 탓인가. 이메일 체크를 하다가 물건을 싸게 사는 경매 사이트에 갔다. 믿을 수 없는 가격에 물건들이 팔리고 있었다. 역시 경매는 경쟁이 덜한 밤에 하는 것이 적격이다. 그래선지 그 사이트엔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심심해서 참가한 경매였다. 몇 번을 거푸 지다 보니 이젠 심심풀이가 아닌 체면이 걸린 문제로 변했다. 겨우 이겨서 물건을 샀는데도 기분은 개운치 않았다. 필요없는 물건이었다. 왜 샀는지, 이 밤에 왜 이러고 있는지 참 한심해 보였다. 쓸데없는 경쟁을 하고, 한편으론 이기고도 씁쓸한 기분이 드는 이것이 산다는 걸까. 

 

외할머니도 종종 밤잠을 못 이루시는 걸 본 적이 있다가. 어렷을때 외갓집에 가서 동네 아이와 함께 놀곤 했다. 갑자기 무릎 뒤로 불같은 통증이 있어 보니 울긋불긋한 두드러기가 나 있었다. 놀라서 우는 나를 같이 놀던 사촌 언니가 할머니께로 데리고 갔다. 할머니가 굵은 소금을 물에 타 손으로 그곳을 벅벅 긁어 댔다. 할머니는 옻이 올랐다고 했다. 마침 앞집 할머니가 보시더니 다 써서 자루만 남은 싸리비를 가지고 왔다. 그 할머니가 몽땅 빗자루로 긁어대니 이젠 화끈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따갑고 가시가 찔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럭저럭 참고 있던 아픔은 점점 인내의 한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마구 소리를 질러대며 울었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다. 참기 어려운 아픔보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나의 속옷이 보였다는 생각에 더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동네 아저씨 두어 분이 내가 놀던 산에서 옻나무를 캐어왔다. 횡재를 한 것이란다. 때론 나의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는 행운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산다는 것인가.

 

계속 뒤척이지만 잠이 쉽사리 오지 않는다. 내일 딸아이 학교에 가서 선생님을 만나야 한다. 칠판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나빠 안경을 썼는데 선생님께서 뒷자리에 앉혔다고 한다. 그 정도는 스스로 해결해도 될 문제인데 엄마인 내게 선생님과 얘기를 해보라 한다. 소심한 딸아이가 어떻게 평생을 살아갈까 걱정이 앞선다. 걱정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도 계속 할 수밖에 없는 이것이 사는 걸까. 

 

전화가 울린다. 여기 또 잠 못 드는 한 영혼이 있다. 친구가 카카오를 보낸 것이다. 고맙다는 이모티콘을 날린다. 한국에서 제일 뜨고 있다는 유머란다. 몇 번을 읽어도 펀치 라인을 못 찾겠다. 그냥 우스꽝스러운 스토리인데 왜 그리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다. 미국에서 살아온 세월이 한국보다 많아서인가. 그렇다고 미국 사람처럼 행동하거나 생각하지도 않는데. 난 한국사람인가 미국사람인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가. 잠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소속이 불분명해진 게 아니라 두 곳에 적을 둔 것이라 믿는다. 서로 다른 두 문화의 불협화음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사는 것인가.

 

아직도 밤이 깊다. 노랫말처럼 내가 걸어갈 때 길이 되고 살아갈 때 삶이 된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 안 되는 삶이지만, 이 또한 지나갈 일이고 하늘에 적을 둔 사람들로 최선을 다해 살아야지 싶다. 나의 창조주께선 ‘사랑하는 이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17/2014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