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생각나는 친구

 

이리나

 

꿈을 꿨다. 벨 소리에 문을 여니 K였다. 이십여 년이 넘도록 한 번도 보지 못한 내 친구 K. 예의 그 수줍은 미소를 띠며 긴 생머리 뒤로 묶은,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새로 이사 간 집을 어찌 알고 찾아왔느냐며 반갑게 맞이했다. 아직 정리가 안 된 상태지만 이곳저곳을 호들갑 떨며 보여줬다. 마주 앉아 반가운 마음에 손을 잡으니 찬기가 느껴졌다. ‘하필이면 산타 아나 바람이 거센 이런 추운 날 왔느냐며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라고 했다. 어쩐 일인지 K는 고개만 끄떡이며 내 얘기를 듣기만 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며 재차 물으면서 잠이 깼다.

 

며칠 후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나의 꿈 이야기를 했다. 잠시 생각하시더니 엄마는 K가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사람이 꿈에 나타나서 아무 말도 안하고 있으면 필경 죽은 사람일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잠시 충격 속에 말을 잃었다. 죽었을 거라고.

하얀 둥근 얼굴에 쌍까풀 있는 큰 눈을 한 K는 집안 환경이 복잡했다. 한 번씩 K의 아버지가 찾아와 집안에 불화가 있을 때마다 나와 이야기했다. 마음에 있는 감정 한 오라기도 남겨두지 않고 다 털어놓았다. 그 후로 K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니고 K의 삶의 무게에 눌려 난 며칠을 밤새 울었다. 가끔 찾아와 집안을 휘젓고 가는 그녀의 아버지가 가증스러워서 울었고, 그럴 때마다 대책 없이 당하는 그 엄마의 무능력함에 울었고, 아무런 방패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K와 K의 어린 동생들이 가여워서 울었고, 어쩔 수 없이 바라만 보는 나의 무력함에 울었다.

 

명동에서 K와 함께 한 때가 떠오른다. 멋진 커피숍에서 비싼 에스프레소를 망설이며 시켰다. 처음 마신 그 진한 커피 맛과 향에 취해서 평생 한 번쯤은 우리도 이런 호사를 해봐야 한다며 웃던 기억이 난다. 물을 섞고 설탕을 넣어도 너무 써 다 마시지 못하고 나온 에스프레소를 두고두고 얘기하면서 매서운 십일월의 바람을 맞고 명동 길을 걸었다. 작은 가게에서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유명배우의 스냅 사진을 한 장씩 샀다. K는 수줍게 웃고 있는 장국영을, 난 이쑤시개를 멋있게 물고 시원하게 웃고 있는 주윤발의 사진을 사서 곱게 수첩에 집어넣었다. 길가에 어둠이 짙어지자 다음에 또 만나자며 헤어진 것이 그 친구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미국에 온 후 몇 번의 전화 통화와 몇 장의 편지가 오고 갔다. 그것이 다였다. 강산이 두 번 바뀌고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편지들과 사진들은 간 곳이 없다. 가끔 K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했다. 나의 삶에 한 페이지가 넘어갈 때면 곁에 없는 친구가 그리웠다. 내 기억 속의 K는 봄날 운동장 벤치에 앉아 산울림의 ‘회상’을 부르고 있고, 한여름에 파란 민소매를 모양새 나게 입고 있고, 긴 생머리 뒤에서 하나로 묶은 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고,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심각하게 외우고 있고, 한 남학생이 준 분홍 꽃무늬 손수건을 가방 깊숙이 간직하고 있고, 내 기말고사 시험지 안에 녹아 있다.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는 건 안다. 하지만 헤어지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줄 알았다. 막연히 기다리면 언젠가 그날이 올 줄 알았다. 설마 ‘살아있어야’라는 조건이 붙는 줄은 몰랐다. 내 친구는 나를 찾아 이곳까지 왔는데, 이 못난 사람은 그 애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인터넷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어디서부터 찾기를 시작해야할지 그저 막막하다. 말없이 짧은 순간 서로 얼굴만 봐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 것 같은 나의 친구. 언제라도 마음만 먹고 손만 내 밀면 만날 것 같은 나의 친구.

 

밖에는 아직도 산타 아나의 거친 바람이 분다. 생명을 잃은 체 허공에 떠도는 낙엽을 본다. 가만히 오랜만에 K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나의 마음에는 아직도 매서운 십일월의 바람이 분다. 장국영의 미소와 주윤발의 웃음이 에스프레소의 진한 커피 향에 섞인 체 스산한 십일월의 바람에 실려 서늘한 내 가슴에 인다.

 

 

12/11/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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