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어스틴에서 캘리포니아 LA까지 여정

 

 

 미국 중남부에 있는 텍사스주에서 서부 캘리포니아주까지 가는 여정. 텍사스주 중심부에 위치한 수도(首都) 어스틴 근교에서 캘리포니아주 LA까지는, 보통이라면 비행기로 이동해야 할 먼 거리겠지만 차로 가는 길이다.

 출발은 텍사스 수도 어스틴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킬린이란 소도시에서 했다. 서부로 난 190번 도로를 타고 6시간 가다 10번 도로로 바꿔 타고 17시간 가면 되는 길. 지도책을 보니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횡단, 캘리포니아를 올라가는 길은, 운전 거리에 비해 정말 단순하기 이를 데 없다.   

 2010년 칠 월 둘째 주공교롭게도 한국으로 치면 제헌절(制憲節) 날이다. 토요일 새벽이라 도시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한 시간을 달려 도시를 완전히 벗어나자 본격적인 시골 풍경이 나왔다. 목가적이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풀 뜯는 소 떼들만 이따금 보인다. 차가 세 시간 정도 달리니 목장 지대가 끝난다. 이젠 이따금 보이던 집도 소 떼도 없이 길옆으론 풀과 잡목과 돌덩이가 뒤섞인 밋밋하고 단조로운 평원이다.

 두 시간 정도를 더 운전하고 가니 잡초와 덤불과 돌과 키 작은 잡목만 새파랗게 깔려있는 대평원이 나왔다.

 태초에 광야만 있었지, 산이란 없었단 말인가.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하늘과 맞닿은 초원만 보이는, 그야말로 말로만 듣던 지평선을 오늘 처음 맞이하는 것이었다. 한 시간을 넘게 시속 70M로 달려도 초록색 도화지를 끝없이 깔아놓은 듯한 평지. 어떻게 이런 땅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종교도 없으면서 오, 신이시여.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자연의 순수랄까.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자연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싹 틔우고 키워낸 풀만 보인다. 사람이 심은 나무 한 그루 없다.

 그동안 5시간 운전하며 지나온 길도 거의 평원이라 할 수 있었지만, 가끔가다 집도 있고, 낮은 언덕도 있고, 커다란 나무들도 있어, 지평선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지평선! 감탄보다는 당혹스럽다고향이 바닷가라서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있는 수평선을 보며 자랐다. 그래서 지평선은 할 수 없이 관념어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남한에서 지평선을 경험할 공간은 없다. 관념어가 아니면서도 관념어였던 '지평선'이란 단어가 비로소 구체명사가 된 날,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설명과 묘사라면 문학을 전공한 터라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인데 도저히 설명과 묘사가 안 되는 장면이다. 벌판이 얼마나 넓디넓으면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있단 말인가. 세상에 이런 공간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감탄 아닌 탄식을 했다. 이 텍사스 대평원은 간접경험이 무의미해 오직 직접경험만으로 그 실체를 알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새파란 초원일지라도 변변한 언덕조차 없는 땅이 이렇게 허전하고 막막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목장 지대는 정겨웠는지 모른다. 시력 좋은 우리나라 사람 눈이 2.0인 데 반해 초원에 사는 몽골 사람 시력은 5.0이나 된다는, 초등학교 시절 '어깨동무'란 잡지에서 읽었던 황당무계한 상식이 떠올랐다. 기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이 풍경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을 것만 같은 일직선 도로를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직선이 얼마나 차고 외로운 것인가를 온몸으로 감지하며 곡선의 따스함과 부드러움에 감사해한다. 오는 차도 가는 차도 없다는 게 더 기막힐 노릇이다.

 목장 지대부터 초원지대까지 여섯 시간을 줄기차게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텍사스 대평원.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거리가 그냥 평지라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처음으로 하늘과 땅이 맞닿아있는 지평선을 보며 국토가 협소한 조국이 생각나 질투심에 소리도 지르고, 욕도 한다. 그래도 초원 한가운데를 곧게 뻗은 길은 아득히 하늘 끝에 닿아있을 뿐이다.

 차창 밖을 지나치는 가로수도, 건물도, 산도, 강도, 굽은 길도, 아무것도 없는 광막한 초원은 그냥 녹색 카펫이다. 시속 120 KM로 달려도 속도감을 느끼지 못한다. 무서운 일이다. 인간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이리라. 이웃, 친구, 동료의 고마움을 이 허허벌판은 가르쳐 준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의 운명이 단절이라면 길의 운명은 어떤 경우든 연결이리라.

 인간과 인간이 마음의 길을 내어 서로 소통하고 교감하고 공감하는 것이 이성에겐 사랑으로, 동성에겐 우정으로, 동료에겐 신의로, 나타나는 것이리라.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는 마음의 길도 귀중하지만,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교역의 길은 집단과 집단을 문화적으로 연결하기에 소중하다. 옛날 실크로드는 얼마나 지난하고 중요한 길이었던가.

 하여튼, 아득히 먼 길은 여전히 하늘에 닿아있고 거기로 달려갈 뿐이다. 이 초록 길을 달리고 달리다 보면 저 하늘나라에 당도할 것이다.

 갑자기 어릴 적 큰어머니가 자주 부르시던 찬송가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떠오른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 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마르크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에 일정부분 동의하는 사람에게 종교적 심성이 잦아드는 건 모를 일이다

 하늘과 맞닿은 초원, 하늘과 맞닿은 길, 길이 하늘로 가고 있다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똑바로 본다.

 지금 서둘러 달려가고 있는 길이 결국 하늘나라로 가는 길임을 오늘에야 깨닫는다. 진작 알았더라면 오만하거나 불손하지 않고, 나태하거나 게으르지 않고, 더군다나 어느 누구와도 싸우지도 않고 상처 주지 않았을 것을......

 불완전한 세포가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운동함으로 생명은 유지된다. 생물학적으로 세포가 안정되면 생명체는 죽음을 맞이한 상태다. ()의 근원은 불완전함이라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라는 존재의 부조리를 체화(體化)시켜, 남을 좀 더 이해하며 겸손 겸허하게 최선을 다해 살라고, 이 끝 간데없는 길은 가르쳐 준다.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것이 전부인, 길을 위한 길을 빠른 속도로 달린다. 고향 길은 만남과 헤어짐의 따스한 공간이었음을 이제야 생각한다. 산을 돌아 강을 따라 마을로 들어오던 고향 길은 다정하여 잊을 내야 잊을 수 없지만, 풀 말곤 산. . 나무. 아무것도 없는 일직선인 이 대평원 길은 어디가 어딘지 전혀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초록''하늘'만 기억할 것이다.  

 텍사스 대평원의 ''은 삶의 흔적이 없다. 한국의 길은 삶 안에 있고 지금 달리는 길은 삶 밖에 있다. 그래서 고향 길은 정겹고 눈물겨운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없어도 내가 있는 미루나무 고향 길을 생각하며, 지금 맹렬하게 달리고 있어도 자신이 없는 텍사스 대평원 길을 달린다. 지나치고 있다는 찰나성만 점으로 존재할 뿐 지속성(영원성)이 없는 길을 달리고 달린다.

 분명하게 앞으로 다가오는 길인데도 백미러로 비치는 길은 순식간에 영상화돼 아득한 뒤안길로 사라져 가뭇없다. 조국의 길들은 대개 산이 가리고 언덕이 가려 여운이 남지만, 이 초원길은 그냥 지평선 너머로 여운도 없이 사라진다. 백미러로 보이는 무량한 초원길의 이미지는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없는 그리움과 아쉬움을 안긴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미래와, 잡초와 땅에 깔린 잡목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는 현재와, 순식간 속절없이 지나쳐간 과거가, 동시에 공존하는 대평원 길을 현재 시속 120 KM 속력으로 달리고 달린다. 악수하고, 손 흔들고, 인사하고, 사람이 오가는 길은 유정하지만, 연결이라는 도로로서의 기능만 있는 길은 무심하고 무정하다. 그래서 직선인지도 모르겠다. 빨리 가 볼일 보고 만날 사람 만나라고. 하여 이 길, 텍사스 대평원 길은 사람이 지나가지만 인간의 체취는 없다. 지나간다는 '현존'과 지나친다는 '소멸'이 동시인 길 이상도 길 이하도 아닌 길일 뿐이다.  

 

 

 킬린에서 아홉 시간을 달리니 텍사스주 서쪽 끝에 위치한 대도시 엘파소가 나왔다. 나무는 없고 메마른 언덕에 집들만 서 있는 풍경. 엘파소부터는 본격적인 사막기후다. 여기서부터 앞으로 또 14시간을 운전해야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대략 세 시간 정도 운전해야 나오는 작은 도시에서 기름을 넣고 요기를 하며 간다.

 대평원을 횡단하는 길은 기능이 먼저지만 사막을 횡단하는 길 역시 기능이 먼저인 도로라서 그런지 승용차보다 트레일러트럭이 많다. 다행인 것은 텍사스 대평원은 오가는 차도 거의 없었지만 여기부터는 비록 트레일러트럭이지만 자주 본다는 것이다.

 말라버린 풀과 허수아비 팔 벌린 모양 멀뚱히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삼지창 같기도 한 사구아(Saguaro) 선인장, 작열하는 태양, 기름기라곤 전혀 없는 흙, 부서진 돌들과 날카롭고 거칠게 서 있는 바위는 태고적 모습이다. 그 광막한 태초의 땅 한복판을 트레일러트럭이 점령군처럼 지나가고 밀려온다. 어렵게 사막을 건너던 인간의 낙타는 더 이상 눈물 짖지도, 힘겨워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욕망만큼이나 무섭게 질주한다.

 사막이라는 원시성과 트레일러라는 현대성이 함께하는 황량한 길에 흙바람이 분다. 먼지로 인해 일시적으로 시계(視界)가 제로가 될 수도 있다는 도로표지판 경고를 보면서도 거대한 낙타들도 힘께 달릴 뿐이다. 황야에 피어오를 먼지는 햇살과 뒤섞여 빛을 발하며 연기도 안개도 아닌 묘한 구름 띠 같은 것을 낮게 드리우며, 웅대한 바위산을 감싼다. 신기루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한다.

 태양은 대지의 모든 것을 태울 듯 뜨겁다. 차 안의 에어컨도 소용없다. 연신 이마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던 나는 “Oh My God!”을 외친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니 순식간에 시원했다.

 구름이 태양을 한 이십분 정도 가려주니 살 것 같다. 하나님이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이스라엘 족속들을 인도하셨다던 출애굽기 이야기가 실감 났다. 큰어머니가 어릴 때 들려주셨던 구약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다던 미디안 광야 호렙산이 저런 곳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유일성'이란 상념을 곱씹으며 중동지역 같은 사막지대를 지나친다. 종교 안에서의 유일성이란 절대 권력이 사회. 정치적으론 독재자의 출현을 가능케 한 기제로 작용했다면 기독교인들은 펄펄 뛸 것이다. 권력()이 하나로 모아질 때 그것은 너무 무서운 것이다.

 유대교 유태인들이야 구약을 자신들의 역사라 굳게 믿겠지만 나에겐 전형적인 신화일 뿐이다. 단군신화나 그리스 로마신화와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이 진정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들이라면 오늘날 팔레스타인을 무차별 공격하는 짓은 안 할 것이다. 그들의 과잉 대응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고 인간애란 눈곱만큼도 없다. 이스라엘 족속은, 선민은커녕 야만 중에 야만족일 뿐이다.

 구약을 하나의 신화로 읽던, 역사적 사실로 보던, 성경무오설을 인정하든 안 하든, 오직 낮은 자 가운데 임하셨던 예수님을 앙망하는 신앙심과 무슨 상관일까란 질문을 하며, 가도 가도 황량한 사막을 달리고 달린다.

 뉴멕시코를 거쳐 석양 길에 접어든 애리조나주. 모텔에 여장을 풀고 잠을 청한다. 15시간을 달려왔는데도 잠이 오질 않는다. 그 유명한 "OK 목장의 결투"란 서부극 무대인 사막지대 애리조나. 팔자수염을 한 거친 사내들이 권총을 들고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내달릴 것만 같다.

 청소년 시절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서부활극을 보며 자랐다. 백인들은 개척이라 미화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침략이고 약탈로 건설한 미국이다. 본래의 주인인 인디언을 죽였고 땅을 빼앗았다. 그 습성을 아직도 못 버린 채, 안으로는 민주주의를 하면서 밖으로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제국주의로, 지금도 중동에서 전쟁을 벌이는 미국. 이라크를 침공한 '부시'에게서 집안 식구에겐 너그럽고 부드러우면서 밖에선 흑인에겐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두르며 포악했던 백인의 근성을 엿보았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텍사스 대평원 길은 녹색으로 푸르러 눈이 피로하지 않았는데, 삭막한 사막을 횡단하는 길은 우선 눈을 피로하게 하더니, 그 삭막함이 정서적으로 전이되어 심신마저 삭막해져 피로감을 더해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과 자신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인 척해도 어쩔 수 없이 감성적인 사람이란 걸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삭막함, 광야, 황야. 광막함, 메마름. 이젠 이런 단어가 더 이상 나에겐 관념어가 아니다. 그 실체를 너무 분명하고 절절하게 온몸으로 체험하며 뉴멕시코, 아리조나, 기나긴 사막을 횡단한다.

 

 드디어 오후, 캘리포니아주 LA 도착하니 어느새 시차가 두 시간 바뀌어 있었다. 서울과 동경(東京)이 시차가 없으니 얼마나 먼 길을 달려왔는지 실감도 하련만, 전혀 실감 나지 않는다. 이른 저녁을 먹고 호텔에 들어와 컴퓨터로 뉴스를 검색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제 그리고 오늘, 한국적 정서와 상상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신세계를 달리고 달려왔다.

 광활한 평원과 사막이 전해주던 형언할 수 없던 감동. 상상도 못 할 대자연을 직접 겪어본 충격.

 눈을 감고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신세계"를 듣는다. 신대륙(미국)으로 이주했을 때 드보르작이 느꼈던 미지 세계에 대한 불안과, 호기심과, 기대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 어마어마한 규모의 신대륙이 지니는 위용에 얼마나 놀랐을까. 개인적인 삶의 안정과 자유, 평화는 얼마나 간절했을까. 책의 행간(行間)처럼 음계 속에 숨어있는 음()의 행간을 읽고 싶다.

 몸은 피곤한데 잠은 오질 않는다.

 오늘의 감동을 아들 녀석에게 어떻게 전해줄 것인가를 생각하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