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하루뿐

유숙자

시야 가득 펼쳐진 푸름이 평화롭다. 하늘빛이 내려와 잠든 묘역. 여기저기 잠을 깨우는 꽃 무더기가 쓸쓸하다. 방금 누군가 다녀간 듯 싱싱한 꽃과 깔끔하게 닦아 놓은 동판 옆에는 흙먼지가 덮여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동판을 닦아 주었다. 활자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생전에 어찌 살았든 이곳에서 누리는 혜택은 거의 비슷하다. 길을 따라 걷는다. 앞서 간 이들의 발자국 위에 내 발자국을 찍는다. 내 발자국은 어떤 흔적을 남길까. 수많은 사람의 발자국 따라 물결 되어 흐르다가 후회와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여행이었으면 좋겠다.

 

고즈넉한 정적이 흐르는 이곳은 잔디가 곱고 나무가 많아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공원 같다. 갓 이민 온 사람이 묘역 옆 프리웨이를 지나며 ‘저런 곳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했다지 않던가. ‘좀 살다 보면 자네도 저곳에다 집 한 채쯤 마련할 수 있을 걸세.’ 함께 가던 친구가 농담처럼 받아넘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나의 친지도 본향으로 가는 의식을 행했고 남은 자들은 한 송이 꽃으로 그의 길을 밝혀 주었다.

 

그분의 갑작스러운 발병과 거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기실 갑작스럽기야 했을까 마는 병이 말기가 되어서 증상을 보였다니 본인도 가족도 당황했을 것이다. 이순을 막 넘겨 시쳇말로 청춘을 구가할 나이인데 그는 잠시 한눈을 팔듯 머뭇거리다가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20여 년 전 친지는 종합상사 미주 지사에 파견됐다. 낯선 외지인데도 온 가족의 적응이 빨랐고 이곳 생활을 즐기며 살았다. 꿈 같은 3년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아이들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싶어 했다. 그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종합 상사의 중견 사원이었으나 ‘아이들을 위하여’라는 명목으로 본사에 사표를 냈다. 학군 좋다는 곳으로 이사하고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서울 수준으로 본다면 구멍가게에 불과했으나 노력한 만큼 보람을 얻는다는 이곳 사람들 말에 기대를 걸고 부지런히 일에 매달렸다. 때로 권총 강도가 들어 혼비백산했고 폭동이 일어 가게 물건을 약탈당했다. 주로 현금 거래였으니 크고 작은 위험이 수없이 뒤따랐다. 팽팽이 당겨진 활시위인 양 긴장된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 자리가 잡혀갔다. 일하는 보람도 있었다. 아이들이 잘 자라 주었고 명문 대학으로 진학해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몇 년만 더한 뒤 멋지게 은퇴하리라.

 

생각과 뜻이 일치하지 않았다. 몇 년을 버티기 전에 건강에 이상이 왔다. 뚜렷이 아픈 데가 없는 것 같은데 날이 갈수록 야위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단 결과는 말기 암이었다. 쇠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멍해지는 의식 저편에서 가물가물 살아나는 20여 년이 보였다. 나이 60에 이것을 얻으려고 황금 같은 젊음을 쏟아부었단 말인가. 미래에만 집착하느라 현재를 잊고 산 결과가 암이란 복병이었던 게 슬펐다. 통곡이라도 해야 시원할 것 같은데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가하게 쉬어본 기억이 없다. 비즈니스를 일구고부터 연중무휴로 일했기에 아이들과 함께 지낸 추억이 없다. 아이들이 어릴 때 그렇게 원했던 크루즈 한 번을 가지 못한 것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끝없이 이어지는 후회와 자책, 현대 최고의 의술과 정신력으로 기적을 만들어 보자는 의사의 말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다. 식단을 짜듯 일과표를 만들었다. 여행도 하고, 음악회도 가고, 산에도 오르며, 살아 있음을 가슴 벅차게 실감하며 병의 진행에 제동을 걸리라. 일 속에 파묻혀 헤어나지 못했던 시간에서 벗어나 삶을 즐기리라. 그러나 시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바람은 물거품이 됐다.

 

R. J. Hastings의 “Station”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는 빨리 종착역에 도착했으면 하고 조바심하며 더디 가는 세월을 답답해한다. 좋은 차를 사고, 집도 사고, 막내까지 대학에 넣고. 내가 은퇴하는 날에 이르면 내내 행복할 것이다. 그날만 고대하다가 머지않아 종착역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생의 참 기쁨은 여정이다. 종착역은 단지 꿈일 뿐이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충실히, 유용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내일이라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오늘은 하루뿐,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며 살라고 일깨워 준다. 인생의 매순간을 중시하란다. 내일이 있다며 오늘을 낭비하지 말란다. 삶의 과정보다 목적만 생각하다가 아까운 시간을 다 허비하는 우를 범하지 말란다. 우리 인생은 제한된 시간을 살다 가련만 시간과 기회가 언제나 있을 줄 알고 먼 곳만 바라보며 어슬렁거리다가 세월은 가고 기회를 놓친다. 오늘 나의 친지처럼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는데 마지막이라는 불청객을 맞는다.

 

여명이 눈뜨는 새벽, 진줏빛 분홍으로 열리는 하늘을 보며 마시는 한 모금 새벽 정기. 풀 섶에 초롱이 맺힌 이슬방울의 영롱함. 새들의 청아한 노랫소리. 방긋 벙글어진 장미의 매혹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들을 수 있는 베토벤. 이 모두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특권이다. 살아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으며 영혼이 깃든 교감을 할 수 있다. 먼 곳을 향해 외로운 손짓 하기보다 하루하루 감사하며 충실히 보낸다면 언젠가 도착하게 될 종착역에 당황하지 않고 닿을 수 있으리라.

 

해가 진다. 낙조를 흘리며 떨어지는 저녘해가 선홍빛으로 하늘을 물들인다. 아름답기에 슬퍼 보이는 빛. 영원으로 이어지는 어둠 속으로 묘역의 하루가 저문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