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눈빛

유숙자

자꾸만 그에게 시선이 쏠린다. 스무 살 안팎의 백인 청년. 처음 보는 사람인데 눈매가 낯익다. 눈동자가 푸른 탓일까. 안색이 창백하다.

늦은 오후 병원 복도는 한산하다. 진료를 기다리는 몇 사람 중, 한 백인 청년이 눈에 띈다. 손으로 빚은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 어디서 보았을까. 꼭 만났던 사람 같은데 얼핏 생각나지 않는다.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느라 간호사의 호명 소리를 듣지 못했다. 진료를 마치고 나오니 청년은 자리에 없었다. 잠시 꿈을 꾼 것 같았다.

 

몇 날 동안 외로운 표박을 계속했다. 드디어 어느 새벽, 섬광처럼 머리를 스치는 빛. 미망에서 깨어나는 순간이다. 청솔가지를 스친 푸른 바람이 솨~ 소리를 내며 가슴으로 들어온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1, 4 후퇴로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우리 가족은 친지를 따라 그의 고향인 경기도 광주에서 짐을 풀었다. 분명 피난을 왔는데 중공군은 이미 우리를 앞서 수원, 평택까지 점령했다는 소식이다. 꼼짝없이 갇힌 신세였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중공군, 공포에 떨었다.

 

중공군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하나 낮에는 유엔군의 공습 탓에 움직이지 않았다. 주로 야음을 틈타 활동했다. 한밤중 민가로 내려와 식기를 가져다 쓰고 새벽이면 다시 갖다 놓았다. 이따금 솥에 넣어둔 밥이나 간장, 고추장이 없어지기는 해도 동네 사람들을 해치지 않았다. 밤이면 조랑말 등에 식량을 싣고 피리를 불며 어디론가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애초부터 패잔병의 기색이 역력했다. 왜소한 몸집에 겨우 몸에 걸린 듯 입혀진 낡은 군복, 의기소침한 모습이 전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공포 대상은 이 고장 출신의 빨갱이이었다. 주민이라고 해야 고향을 두고 차마 떠날 수 없다며 집을 지키는 노인과 피난민이 있을 뿐인데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행패를 부렸다. 동네 사정을 잘 아는 빨갱이들이 부잣집을 골라서 식량과 가재도구를 약탈했다. 조금이라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 보는 앞에서 사살하여 주민을 공포에 떨게 했다.

 

중공군 모습이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더니 유엔군이 들어 왔다. 최 일선에서는 교전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광주에서는 총소리 한 번 들어본 적 없었다. 고대하던 유엔군이 들어 왔는데 갑자기 동네가 술렁거렸다. 유엔군이 젊은 여자들을 겁탈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처녀들이 숨어 살아야 했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인 언니도 광 속에 숨어 있었다. 근동에서 아직 누구 한 사람 피해를 본 사람이 없는데도 소문은 무성하게 퍼졌다.

 

뒷산에 미군이 주둔한 지 거의 두 달 가까이 된다. 산이라고 해야 언덕만큼이나 경사가 완만해서 군인들의 기거하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잘 보였다. 그들은 매일 무슨 회의를 하는지 종일 머리를 맞대고 앉아있다.

아버지는 유엔군들과 교분이 있었다. 당시 동네에서 의사소통되는 민간인은 아버지뿐이었다. 미군 장교들과 아버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주로 우리나라의 역사 이야기를 하셨고 미군 장교들은 전세와 고향의 가족 이야기를 했다 한다. 그들은 전쟁 중의 군인답지 않게 여유가 있었다. 때로 아버지와 함께 권총으로 깡통 맞추기도 하고 땅바닥에 뭔가 그려가며 설명을 했다. 개성이 고향이신 아버지는 실향민이셨기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다시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셨으리라.

 

어느 날 새벽, 먼동이 트려면 아직 이른 시각인데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뭔가 부딪히는 둔탁한 마찰음이었다. 잠귀가 밝은 나는 소리 들리는 곳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부엌 쪽이었다. 어머니가 이른 새벽에 무얼 하실까? 궁금하여 나가보니 웬 낯선 백인 병사가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옆에는 반쯤 잘려나간 도마와 칼이 보였다. 병사는 도마를 쪼개어 아궁이에 불을 집힌 것이다. 스무 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어린 병사가 두 팔로 배를 감싸 안고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인기척에 놀라 나를 쳐다본다. 창백한 얼굴. 연기 탓에 눈물이 났는지 눈이 젖어 있었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주며 받으라는 시늉을 했다.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아버지를 깨웠다. 아버지가 부엌으로 가셨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어린 병사는 추운 날 새벽녘이면 배가 아프다고 했다. 군의관에게 진료를 받고 약을 먹어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에 시달렸다. 그날도 배가 아파 군부대에서 제일 가까운 우리 집으로 온 것이다. 어릴 때도 겨울이면 배앓이를 했는데 어머니가 따뜻한 물주머니를 만들어 배에 놓아 주시거나 장작불이 활활 타는 난로 가에 앉혀 주시면 차츰 편해졌다고 한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어린 병사를 위해서 자잘한 나무를 준비해 두셨다. 배가 아프면 언제라도 찾아와 불을 쬐라고. 아버지 말씀으로는 어린 병사가 가족이 그리워 생긴 병일 것이라 했다. 당시 미제 약이라면 만병통치의 위력이 있을 때인데 약이 없어 못 고칠 리 없고 고향이 그리워 생긴 병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린 병사가 불쌍했다. 어떻게 도와주어야 배가 아프지 않을지 궁리해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새벽이면 우리 집 부엌에서 인기척이 났다. 나는 자다가도 어린 병사가 올 때쯤이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매일 그 날이 그날인 삶, 학교도 갈 수 없고 친구도 없이 종일 형제끼리 지내다가 누군가 새벽마다 우리 집을 찾아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선하고 막연한 기다림을 키우게 했다. 군불을 지펴 주는 이가 있어 방의 냉기가 조금 가시는 듯했다.

 

어린 병사가 다녀간 부뚜막 위에는 껌이 초콜릿이 캔디가 놓여 있었다. 뒤주 위 바구니에는 어린 병사가 주고 간 달콤한 것들이 소복이 담겨 있었으나 형제들은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껌이나 초콜릿을 아주 좋아했으나 왠지 선뜻 집어지지 않았다.

통역 장교인 정 대위가 아버지를 찾아와 이틀 후 부대가 이동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어머니는 어린 병사가 걱정되어 솜을 두둑이 넣고 배 두렁이를 만들어 아버지 편에 보내셨다. 군인이라 민간용품을 사용할 수 없다 할지라도 배 두렁이를 보며 잠시나마 고국에서 아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기도하고 계실 어머니를 느끼게 하고 싶었던 어머니의 정성을 전했다. 어린 병사는 배 두렁이를 받으며 눈물을 흘렸다. 정말 생시같이 선명한 꿈이었다.

 

어린 병사가 떠난 후, 우리 식구는 조금 침울했다. 꼭 집어 뭐라고 이유를 들 수 없었으나 모두 말수가적었다. 일면식도 없던 이국 병사였건만 도마를 쪼개서 불을 때던 어린 병사가 눈에 어른거렸다. 청포도 빛 파란 눈에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배를 움켜쥐고 앉아 있던 어린 병사가 자꾸만 떠올랐다. 부대가 이동한 지 한참 후까지도 새벽녘이면 귀를 열어 놓았다. 어린 병사가 다시 올 것만 같아 몰래 일어나 부엌 쪽을 기웃거렸다.

 

전쟁은 11살의 어린 소녀에게 삶과 죽음, 이념의 갈등 등, 이해되지 않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너무 많이 보여 주었다. 어린 병사를 통하여 인류의 사랑을 보여 주었고 그 가정의 어머니 모습까지 떠올리게 했다. 추우면 배앓이를 하는 아들 생각에 난로도 집히지 못하고 기도하고 있을 것 같은 어머니가 생각났다. 20여 세도 채 되지 않았을 어린 나이에 이역만리 타국에서 추위와 고독과 그리움과 싸우며 힘들 때마다 얼마나 많이 어머니 생각을 했을까.

 

정전된 지 60여 년이 지난 지금, 잊고 지냈던 어린 병사가 새삼 떠오르는 것과 6월이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전쟁 당시, 자신의 나이 또래 같은 손주를 앉혀 놓고 할아버지가 한국 전쟁에서 펼쳤던 무용담을 들려 주고 있을 지. 혹은 이국의 어느 이름없는 능선에서 산화되었는지 알 수 없는 어린 병사. 꿈속에서 배 두렁 이를 받으며 눈물을 글썽이던 어린 병사의 모습이 반세기가 지났는 데도 잊히지 않는다.

 

지나간 일은 아름답다 했지만 그리 표현하기엔 적절치 않은 그 무엇. 아득하고 애잔한 연민으로 남아 있기에 바람을 껴안은 듯 허허로운 가슴이 되는가 보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