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손대지마시오 

                                                                               유 숙 자

글 한 편이 완성되면 탈고하기 전 누군가 한 번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반복하여 수정하기보다 읽어 주는 글을 독자로서 듣고 싶다. 그 영광스러운 배역을 남편에게 주건만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표현이 없는 사람이라 전에도 글이 좋다거나 잘 썼다거나는 바라지 않았지만 완성되면 읽기는 했다. 요즘은 받아서 놔둔다.

“당신 잘 쓰잖아? 시간 있을 때 볼게.” 이 말은 귀찮다는 말의 다른 표현인 것 같다. 만사는 때가 있음을 실감케 하여 격세지감을 느낀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에는 원고지를 사용했다. 컴퓨터가 보편화되기 전이다. 컴퓨터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를 때였고 어디서나 종이 원고를 잘 받아 주었다. 컴퓨터는 회사나 대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아 아들 방에 컴퓨터가 있어도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때는 남편도 집에 컴퓨터를 두지 않았다. 어느 날 컴퓨터로 글을 쳐 주겠다고 말했을 때 비로소 내 글도 책처럼 활자화될 수 있다는 것에 놀라고 신기했다. 그만큼 컴퓨터에 관해서 문외한이었고 손글씨의 불편함이 없었다.

‘오자(誤字) 내지 말고 잘 쳐다 줘요.’ 출근하는 남편에게 원고를 건넸다. 말수가 적은 남편은 알았다는 듯 힐끗 쳐다보고 나간다.

 

퇴근해 들어오면서 남편은 신도 벗기 전에 종이부터 내밀었다. 잘 짜인 직조처럼 활자화된 글이 보기 좋았다. 선명하게 찍혀 있어 읽기 편했다. 그도 잠시, 읽다 보니 글자가 고쳐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A와 B 노트에 수없이 옮겨가며 수정했기에 단어 한 자 토씨 한 개 빠짐없이 외우는데 여기저기서 생소한 글자가 삐죽삐죽 얼굴을 내민다. 그제야 감이 왔다. 불쾌했다. 화가 치밀었다. 태연히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 남편이 밉살스러웠다. 한마디 언급도 없이 고치다니. 또 고쳤으면 이 표현이 더 나을 것 같아서라든지 무슨 말이라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속이 부글거려 견딜 수 없었다.

 

‘글 왜 고쳤어요?’ 도전의 자세 물었다.

‘어, 그래? 그럼 다음부터 안 고칠게.’

너무도 담담하다. 간단명료하다. 잔뜩 화가 난 내가 오히려 맥이 빠진다. 다음에는 안 고치겠다는데 더 할 말이 있겠는가. 기분이 언짢았으나 먼저 호의를 베풀었기에 참기로 했다.

 

두 번째 글도 여전히 손을 댔다. 그 후에도 원고를 내어 줄 때마다 번번이 몇 군데씩 고쳐져 돌아왔다. 절대로 고치지 말라고 ‘절대로’에 힘을 주어 강조해도 마이동풍이다. 머리가 핑그르르 돌 지경이다.

‘제발 원문대로 치기만 하세요. 부탁이에요.’

‘알았어, 그냥 눈으로 보고 손으로 칠게.’

말은 선선하게 나오지만, 사명감에 불타는 듯 ‘알았어’ ‘알았어’ 를 연발하면서도 도박에 중독된 사람처럼 교정 작업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나중에는 아예 한 부는 원문대로, 또 한 부는 고친 것, 둘을 가져오며 대조해 보라는 게 아닌가. 어느 쪽이 더 나은가를. 나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다.

 

‘당신은 작가가 아니잖아요?’

화가 나서 기를 좀 죽이려고 작가 운운해 봤지만, 기가 죽기는커녕 한 두 군데씩 손대는 버릇은 여전했다. 남편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너무 냉정해서 찬바람이 쌩 할 정도인데도 지나친 관심으로 유 작가를 화나게 하고 있다. 남편은 내가 쓴 글의 전체적인 흐름보다 부분적인 표현 부족을 보완하고 싶었던 게다. 결국, 본래의 원고대로 돌아오기까지 몇 번의 승강이를 거쳐야 했다. 보통 피곤한 게 아니었다.

 

왜 내가 남편에게 원고를 주고 사서 고생을 하지? 펜으로 쓰면 되는데, 하던 대로 하자. 모든 일은 마음먹게 달렸다고 하는데.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것도 잠시, 해가 바뀌고부터 원고 청탁 방식이 달라졌다. 종이 원고를 거절하지는 않아도 디스켓에 담아 달라는 주문이 늘고 있었다. 종이 원고는 받는 쪽에서 일일이 다시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을 해야 하니 힘들고 번거로운 탓이리라.

 

이를 어쩌지? 컴퓨터 작업으로 변환시켜야 하는데. 남편과 원고를 두고 다시 신경전을 벌이고 싶지 않다. 원고는 맡겨야 하고, 마음이 편치 않다. 드디어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무릎을 쳤다.

남편에게 글을 내밀며 당당하게 말했다.

“원고가 고쳐져서 오는 날 저녁 식사는 없습니다.”

 

남편은 집에서 식사하는 것을 좋아한다. 집에서 만든 음식이 좋다고 하여 그 입맛 맞추느라 고달프다. 이민 초기에는 고추장 된장도 집에서 담갔다. 지금까지 김치나 반찬을 사 본 적이 없다. 남들은 손님 대접을 밖에서 하건만 남편은 집에서 하는 것을 좋아한다. 편안히 앉아 이야기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 이유다. 라면도 끓일 줄 모르는 사람. 저녁 식사는 언제나 5시. 시장기를 참지 못하는 약점을 이용해서 마침내 히든카드를 꺼내 들었다.

 

길만 건너면 바로 글렌데일 겔러리아의 후드 코트가 있어 먹거리가 즐비하기에 식사를 거르게 될까 봐 원본대로 가져왔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그 때부터 원본이 그대로 활자화 되어 돌아왔다.

 

이제는 남편에 의해 고쳐지는 수난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남편의 표현이 더 나을 때도 있었으나 그것을 인정하면 더욱 신이 나서 글 전체에 손을 대겠기에 아예 무시했다.

그 무렵 글 벗 몇 분과 점심을 나누던 중, 컴퓨터를 할 줄 몰라 겪었던 수난사를 펼쳤다. 너무도 재미있는 사건이라며 한참 웃던 소설가 Y 선생이 충격적인 말을 했다.

 

‘뭐든지 잘할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컴퓨터를 못해서 그 고생을 했다니 너무도 안 어울린다.’며 당장 컴퓨터를 배우라고 간곡히 권했다. Y 선생의 권고에 힘입어 컴퓨터를 샀다. 처음에는 써 놓은 글이 날아갈까 봐 종이에 쓰고 그것을 컴퓨터로 옮겼으나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여 숙련공이 된 듯 손끝에 가속이 붙었다. 아마도 Y 선생 적극적 권고가 없었다면 그렇게 빨리 컴퓨터를 준비하지 않았을 거다. 노트 두 권에 번갈아 옮겨가며 교정하다가 글이 모양새를 갖추었다고 생각되면 탈고했으니 애꿎게 없어지는 것은 종이요, 덕분에 생긴 것은 가운뎃손가락에 달린 콩알만 한 혹이다. 아무리 길게 쓴 작품이라도 술술 외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수없이 옮겨 쓰기를 반복했기에 가능했다.

 

오래전 등단 초기의 일화지만 남편이 사명감에 불타서 내 작품을 고치려 들었을 때가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었는지 모르겠다. 가까운 사람이 콩쿠르나 운동 시합에 나가면 실수할까 봐 손에 땀을 쥐고 정면으로 보기조차 안타까워하는 그런 마음 아니었을까. 나름대로는 글 쓰는 사람을 아내로 두었기에 남편으로서 지대한 관심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고 더 좋은 글을 위한 배려였을 텐데 참고하려 들지 않고 무조건 거부하고 자존심과 결부시켰던 나의 모자람이 부끄럽다.

 

그 사건 이후부터 줄곧 컴퓨터로 글을 썼지만, 이따금 예전 일이 생각 날 때면 입가에 게면적은 미소가 흐른다. 남편의 약점을 이용했던 일.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꽉 차지 않은 사람이 뭔가에 입문했을 때 겸손을 잃는 모자라는 자세. 뭔가를 이룬 것 같은 냄비 근성. 자만에 싸여 요란한 소리를 냈던 것이 후회스럽다.

 

아내이기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좀 더 나은 글이기 원해서, 자신이 고친 글을 들고 작품성까지 논하던 그의 생기로운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그 마음이 얼마나 귀한가를 깨닫게 된 지금에서야 미안함을 앞세운 고마움을 전한다. 아! 옛날이여, 해도 소용없는 지금에야.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