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지팡이

                                                                                          신순희

 

 

무심하게 파란 하늘. 관광버스는 겨우 낭떠러지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다. 조금만 흔들려도 절벽으로 굴러떨어질 판이다. 승객들은 제자리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맨 뒷좌석에 앉은 언니는, 몸을 꼼짝할 수가 없다. 눈을 감았다. 아무 생각이 안 났다. 얼마나 되었을까, 구조대가 왔다. 버스를 밧줄로 묶어 끌어내고서야 언니는 숨을 내쉬었다. 누구보다 부상이 컸던 언니는 곧바로 헬리콥터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햇살 가득한 봄날, 퇴직한 동료들과 서울 근교로 떠난 여행길이었다.

그날 사고로 언니는 척추를 다쳤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유, 걸을 수 있잖아.” 위로가 될까. 시애틀에서 나는 전화로 언니에게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언니는 이제야 자신만을 위한 지팡이를 쥐게 되었다. 
    
언니는 나의 지팡이였다. 맏딸로서 책임감이 강했다. 오 남매의 맏이로 먼저 어른이 되어버린 언니는, 귀찮아하지도 않고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녔다. 여섯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나를 위해 보호자가 되어준 적도 있었다. 언니의 동그란 얼굴을 보면 그냥 좋았다. 언니를 닮고 싶었다. 함께 클래식 음악을 듣고 연극을 보고 전시회에 갔다. 소리 없이 흔들리는 사춘기의 나를 붙잡아 준 건 언니가 사 온 각종 문학 전집이었다. 그때 내 눈에는, 언니의 모든 것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언니는 아버지를 닮았다. 큰 키와 낙천적인 성격, 길쭉하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까지 똑같다. 언니는 첫 봉급을 타서 아버지에게 민짜로 납작하게 모양을 낸 금반지를 선물했다. 그 반지는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굵은 손가락 마디에 걸려 결코 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떠날 때 끼고 가셨다. 아버지 입관할 때  언니는 아버지 틀니를 꼭 함께 넣어야 한다고 연신 말했다. 아버지가 제사상에 음식을  잡수어야 한다고.
    
식구들이 번갈아가며 간호를 했지만, 아버지의 임종은 언니가 했다. 예사롭지 않게 큰 숨을 한번 내쉬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언니 인생의 두려운 정지된 순간이었다. 언니가 시애틀로 부친 편지는 꼬기적거리고 흐느적거렸다. 투병하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전했다. 집에 가고 싶다시며, 아버지가 병실 침상에서 발을 내려놓으시면, 언니는 도로 그 발을 올려놓고는 했다고. 묵묵히 도리를 다한 그때, 언니는 아버지의 지팡이였다.
    
언니는 어머니에게 한결같다. 다른 딸들은 말대꾸하며 어머니 심기를 건드려도 언니만은 거역하지 않는다. 교통사고가 난 뒤에도 언니는 이따금 어머니를 모시고 외출한다. 모녀가 다 걷기 힘들다. 아직 어머니는 지팡이를 짚지는 않으신다. 어머니는 모시겠다는 오빠네를 마다하고 혼자 사신다. 어떤땐 맏딸이 더 믿음직하고 편하신 모양이다. 어머니가 이젠 아흔이시니 내일을 알 수 없다. 아버지의 임종을 본 언니가 또다시 그런 가슴 아픈 일을 홀로 겪지 않기를 바라지만, 나는 무어라 말할 수 없다. 여태껏 받기만 한 내가 언니에게 해 줄것이 하나도 없다는 게 염치없을 뿐이다.
    
오월이었다. 십여 년 만에 보는 서울은 분주하고 명랑했다. 스쳐 가는 사람들은 활기차고 자신감이 넘쳤다. 그날 백화점 입구에서 만난 언니는 지팡이를 짚고 펑퍼짐한 긴 상의로 구부러진 등을 감추고 있었다. 가슴에 찬바람이 휙 지나갔다. 두꺼비같이 투박한 신발을 신은 언니는 표정이 없었다. 자꾸 눈길이 지팡이를 쥔 언니의 손으로 갔다. 그날 언니와 나는 천천히 쇼핑하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느리게 느리게.
    
언젠가 언니는 말했었다. 우리 네 자매 함께 여행하자고. 각자 사는 게 바쁘다며 언제 그럴 수 있을까 미루던 중에 언니가 덜컥 지팡이를 짚게 되었으니, 후회는 이렇게 늘 뒷머리를 잡는다.
    
서울을 떠나던 그날 인천공항에서 헤어질 때 언니는 말했다. “내가 긴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그토록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던 언니가 많이 연약해졌다. 지금 언니는 자신의 지팡이를 잡았다. 마음도 몸도 지팡이에 순응하는 길을 걷고 있다. 그 길을 가면서 돌부리에 걸리지 않게 내가 앞서 걷고 싶다. “언니, 약해지면 안 돼. 다음에 시애틀 올 때는 지팡이 던져버리고 와야 해.” 이제는 진정 내가 언니의 지팡이가 되어 줄 차례다.

 

 

[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