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음악회(파밀라II)

유숙자

겨울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포근한 날씨다. 자목련이 지고 겹 동백이 막 봉오리를 터뜨렸다.

1월의 마지막 주말 저녁, 파밀라 댁에서는 손님 맞을 준비로 한창 바쁘다. '그레함 추모 20주년'을 맞이하여 가까운 친지와 다정하게 지내는 이웃을 초청했다. 올해 구십 세가 되는 파밀라가 오래전부터 꿈꾸어 온 일이다. 아들이 정년 퇴임하고 돌아오면 친지들을 모시고 추모회를 열겠다던 소망을 이루는 날이다.

낯익은 얼굴이 하나둘 모여든다. 고적이 감돌던 집에 생기가 돈다. 거실을 가득 메운 손님들은 그레함을 추억하며 갖가지 에피소드를 털어놓기 바쁘다. 식탁에는 먹음직스런 로스트 비프, 욕셔 푸딩 등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하다. 접시 사이사이를 Holly tree로 장식해 운치를 더했다.

 

파밀라가 환영 인사를 한다.

'아름다운 밤입니다. 밤이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한때는 바람이 지나가도, 행인의 발걸음 소리에도 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거기 그가 있을 것만 같아서. 가슴 한쪽을 잃은 공허로 외마디 신음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가장 힘들 때 여러분들은 나에게 신의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영혼 밑바닥에서 솟아나는 삶의 감사로 슬픔을 지워가게 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남편 그레함도 천국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감사인사가 끝나자 파밀라를 위해 잔을 높이 들었다.

 

그레함 부부를 처음 만난 것은 산행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서였다. 산에서 내려오는데 가장 먼저 봄을 맞은 노부부를 보았다. 이른 아침인 데도 그들은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일주일이면 서너 번 그 집 앞을 지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몇 마디씩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봄비가 소리 없이 내리던 어느 날이다. 산행에서 내려 오는데 파밀라가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차 한잔 하지 않겠어요?’

탁자에는 이미 꽃무늬 찻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날 이후 이따금 티 타임을 갖곤 했다. 그들은 작은 일에도 크게 감탄하고 매사를 흥미 있게 들으며 긍정적 사고가 몸에 배어 있었다. 독일에서 대학교수로 있는 아들 내외와 I Q가 신동에 가깝다는 손자 이야기를 할 때면 내 일상에 차질을 줄 정도였다.

 

그레함 부부는 클래식 음악에 일가견을 피력할 정도로 전문성을 지녔다. 입이 벌어질 만큼의 많은 LP와 CD가 벽면을 가득 채웠고 윤기 도는 그랜드 피아노가 거실 창가에 놓여 있었다. 가끔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피아노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파밀라는 여러 번의 연주회 경력이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그들은 리스트의 “사랑의 꿈”을 좋아했다. 파밀라는 감미롭고 로맨틱한 곡을 남편을 위해 연주했는데 서로의 시선 속에 더할 수 없는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다. ‘밥은 굶어도 음악 없이는-’ 할 정도로 나도 클래식 마니아이기에 음악 감상을 곁들인 대화는 무궁무진하게 이어졌다. 때로 공연장을 찾기도 하고 바비큐도 즐기며 돈독한 이웃 간의 정을 쌓았다.

그레함은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를 즐겨 들었다. 오래전이긴 하나 원작 소설 <춘희(알렉상드르 뒤마)>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동백꽃을 좋아하게 된 것도 춘희를 읽고 난 후라 했다. 꽃처럼 젊은 나이에 애절한 사랑을 품고 죽어간 ‘동백꽃 여인’이나 꽃봉오리가 벙글자마자 떨어지는 동백꽃에 연민이 스미더란다.

 

해가 바뀌고 한동안 바빠 산행을 중단했다. 새해 인사를 나눌 겸 어느 하루 파밀라 부부를 초대하려 했는데 그레함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파밀라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을 가누지 못해 몸져눕고 말았다. 생활에서 기쁨이 사라졌다. 칩거의 날이 계속되었다. 우울과 무기력으로 삶의 의욕을 잃어갔다. 물기 없이 말라갔다. 몸이 뜬 숯 사위듯 사그라들었다. 갑자기 너무 늙어 보였다. 봄이면 커튼부터 산뜻하게 갈던 것조차 잊어 묵직하게 매달린 겨울이 그녀의 초점 없는 표정과 흡사했다. 아들 내외가 여러 차례 독일로 모셔 가려 했으나 남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별의 슬픔은 그리움의 정한이다. 단절과 상실과 좌절을 어찌 쉽게 잊힐 수 있을까마는 자기 자신 속에 갇히는 일만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그레함과 함께한 50여 년에 깊숙이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계절은 푸른 잎을 시들게 했고 다시 싹을 틔우기 반복했다.

세월은 그녀에게서 기어코 침체를 빼앗아 내고 말았다. 머지않아 맞이할 죽음을 바라보며 비로소 갖게 된 평안. 드디어 새가 알에서 깨어난 것처럼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정원으로 나왔다. 대낮처럼 밝혀 놓은 등불과 열기구가 쾌적한 밤을 만들어 주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의자에 모두 앉았다. 1부 추모 예배가 끝나고 2부 그레함에 바치는 음악회가 열렸다. 거실에는 실내악단이 앉아 있다.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 내외, 증손녀가 연주를 시작했다. 그레함이 즐겨 부르던 '어메이징 그레이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누구랄 것 없이 따라 불렀다. 아들 제르미가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 2막의 아리아 '프로반자 네 고향으로'를 열창했다. 서너 곡 소품의 연주를 마치고 실내악단이 퇴장했다.

텅 빈 거실에는 피아노만 뎅그러니 놓여 있다. 그때 검정 비로드 드레스에 빨간 동백꽃을 가슴에 단 파밀라가 피아노 앞에 사뿐히 앉았다. 그의 손이 물결을 탄다. 리스트의 <사랑의 꿈>이다.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가슴이 촉촉이 젖어 지나간 시절이, 잊힌 가슴의 고동이 되살아난다는 로맨틱한 곡. 그레함 살아생전 그를 위해 즐겨 연주했고 남편이 그리울 때면 밤새워 건반을 두드렸다는 <사랑의 꿈>을 사랑하는 이에게 바치고 있다. 먼 옛날을 회상하는 듯, 꿈속에서 헤매는 듯,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여 몸놀림이 갈대의 몸짓처럼 흔들리고 있다.

 

거대한 우주를 삼키려는 폭넓은 연주가 중반으로 이어진다. 삶의 굴곡, 비바람 치는 계곡과 능선을 지나며 거친 바다의 일엽편주 되어 파도와 풍랑과 맞서 싸우는 격정을 지나 이윽고 인생의 황혼에서 보여줄 수 있는 넉넉함, 평화로움이 여운처럼 번지다 잦아들며 연주가 끝났다. 모진 그리움과 대면하고 있는 것일까? 파밀라는 한동안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제야 힘찬 박수가 쏟아졌다.

 

음악회가 끝났다.

모두 떠난 텅 빈 정원에 파밀라만 오롯이 남았다. 뺨 위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20여 년을 참아낸 그리움이다. 감정의 수위가 여지없이 무너진다.

주룩주룩 늘어진 느릅나무 가지 사이에 반달이 걸려 있다. 머리 위에 북두칠성도 영롱하다. 밤은 밝아올 날을 맞으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