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새 해 맞이 대청소를 했다. 먼지를 보얗게 쓰고 있는 책이며 살림 도구들에 미안했다. 빈궁한 살림살이도 바지런한 주부의 손길을 거치면 영양 좋은 아이 얼굴처럼 빛이 난다. 하지만, 대궐 같은 집에 고급 가구들이 즐비해도 주부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영양실조 아이 얼굴처럼 푸석푸석해서 보기에도 민망하다.
대충 정리를 한 뒤, 불을 지피고 벽난로 앞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셨다. 시선 너머로 벽면에 붙어있는 편액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같이 나와 이민사를 함께 써 온 귀한 액자들이다. 그리고 정으로 연결된 사람과 함께 저마다 애틋한 사연 한 가지씩 지니고 있는 애장품이다.
'목련화 수 액자'는 근로 청소년 센터에서 일할 때, 우리 수강생이 한 뜸 한 뜸 수를 놓아 12월 28일 내 생일을 기념해 준 선물이다. 하루 열 너 댓 시간씩 일한 뒤, 촉수 낮은 전등 아래 잠 오는 눈을 비벼가며 한 올 한 올 수를 놓았을 그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저릿하다.
'더불어 사는 삶'이란 붓글씨는 중국어와 붓글씨에 능했던 함형석 교수님께서 써 주신 글이다. 처음에 '나의 사랑 나의 조국'을 써 달랬다가, 엄청 혼나고 한 달 뒤에 다시 받은 작품이다.
이민을 앞두고 내 마음은 무척 심란했다. 사실, 오고 싶지 않은 미국 이민 길이었다. 갓 서른이 된 나는 외국 신부님과 함께 근로 청소년 센터 교육부장으로 열정을 쏟고 있었다. 보람도 컸다. 하지만, 지역적 거리감을 줌으로써 사랑을 잠재워야할 사람이 있었고 왜 빨리 안 오느냐며 재촉하는 어머니와 사시장철 봄과 가을밖에 없다는 캘리포니아 날씨에 설득당해 이민을 결심했다.
죽음 다음으로 먼 미국이라 생각하던 나는 망명자의 비장한 심정으로 고국에서 가져갈 마지막 상징적 선물에 골몰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조국의 흙'이었다. 그러나 이내 '에이! 내가 무슨 쇼팽이라고' 하는 생각이 들어 싱거웠다. 두 번 째로 떠오른 것이 '무궁화 꽃씨'였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문익점인가' 싶어 고개를 저었다.
며칠 지나자,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가 생각났다. 좋은 생각이다 싶어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나 스스로 조국을 잊지 않을 뿐만 아니라, 2세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가르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웬걸? LA에서 살다 역이민 온 친구가 찬물을 끼얹었다. LA는 한국 학교도 많고, 교재도 학교에서 다 나누어 준다는 거였다.
그 이후에도 '앉으나 서나' 이민 짐에 넣어갈 상징적 선물에 골몰했다. 그 때, 문득 떠오른 것이 '붓글씨 한 점'이었다. 무엇보다도 내 조국을 잊지 않겠다는 결심만 있다면, '대한의 딸'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의 사랑 나의 조국'이란 문구가 뇌리를 스쳤다. 정말 가슴 뛰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말 한 마디로 칠십 초로의 함교수께 그토록 호된 질책을 받을 줄은 몰랐다.
그 큰 나라로 이민 가면서 글로벌적인 세계관을 품고 가야지, 소인배같은 국수주의를 가지고 가서야 되겠느냐며 일갈했다. 역시 만주 벌판에서 광복가를 부르고 독립군을 위해 불어준 휘파람 하나로 일경을 피하게 했던 소년투사는 사고부터가 다르구나 싶어 감동했다. 함교수는 교수 정년 퇴임식에서도 일체의 군말 없이 힘찬 광복가와 일성 호각과도 같은 휘파람을 휘익 불고는 유유히 사라진 전설적 인물이다.
다시 생각해 오라는 지엄한 주문을 받고 나는 아주 소박한 마음으로 '더불어 사는 삶'을 택했다. 어디에서 누구랑 살든, 이웃과 더불어 살겠다는 내 사랑의 의지가 담긴 말이다.
'심전경작' 역시, 이민 선물로 받아온 김종원 교수 붓글씨다. 어딜 가나 마음 밭을 옥토로 갈고 살라는 당부와 함께. 그는 교수이기 이전에 내겐 아버지 같이 친근한 분이다. 어머니와 같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학창시절 일 이등을 다투었던 인물이다.
훗날, 교생 실습 자료 도움을 청하며 '고성 김수연 딸'이라고 말하자 소년처럼 상기된 얼굴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오십 여 년 전 추억을 더듬던 그는 어머니의 결혼을 막으려 집에 왔다가 호랑이 외할머니 보고 얼어붙어 한마디 말도 못하고 갔단다. 어머니가 모르는 에피소드였다. "너희 엄마가 참 예뻤니라......." 하고 한숨처럼 뱉는 교수님 눈동자에 노을 같은 세월이 어른거렸다.
인물과 재능으로 날렸던 어머니의 꿈을 꺾은 외할머니가 야속했다. 어머니가 원하던 진주 사범만 갔었어도 어머니의 인생길이 달라졌을 텐데. 하지만, 어머니의 운명은 거기서 꺾어진 골목길로 들어서야 했다.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한 게 아니라 평생을 좌우했다. 어머니는 미국에 와서야 십 수 년 동안 영어 학교를 다니며 배움의 한을 푸셨다.
시화 액자 '떠나가는 배' 역시, 이민을 앞두고 눈물 꽤나 뺀 노래다. 조국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한국 가곡 전집' 레코드를 샀다. 이민 짐에 넣어갈 심사였다. 거기서 처음 '떠나가는 배'를 발견했다. 노래를 처음 듣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너무도 애절한 가사와 멜로디가 내 처지와 맞물려 가슴을 후벼 팠다.
밤마다 레코드를 틀어놓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정든 모든 것을 두고 낯선 이국으로 떠나야 하는 내 자신이 '떠나가는 배'가 되어 '거센 바다로' 둥둥 떠갔다. 때로는, 두고 가는 그 모든 것이 '날 홀로 남겨두고' 떠나가는 배가 되어 날 떠나갔다. 이민 짐에 무거운 한국 가곡 전집 레코드를 넣어온 것은 물론, 훗날 애송시 시화전을 할 때 '떠나가는 배'를 시화 액자로 꾸며 지금까지 벽에 걸어주고 그때의 감상에 홀로 젖곤 한다.
벽에 붙은 나의 귀한 편액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본다. 그리고 그와 연결된 나의 정인들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신다. 시간은 '세월'이 되어 멀리도 흘러갔다. 거세게 굽이쳐 온 강물이 하구에 몸을 뉘이듯, 비스듬히 벽에 등을 기댄다. 어느 새, 서편 하늘 노을도 빛을 잃어가고 어둠이 순한 소처럼 마을로 내려온다. 34년 이민사를 함께 써온 나의 액자와 함께 올해의 마지막 밤이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