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쥬 광장 안의 빅토르 위고의 / 이정호

 

  동생에게 보쥬 광장에 있는 빅토르 위고의 집을 가보고 싶다고 했다. 마레 지구에 있다고 하며 전철을 타고 있다고 했다. 파리에서 전철은 처음 타보는 것이다. 1900년에 파리 만국박람회 개최로 1호선이 처음 개통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호선, 4호선, 14호선은 완전자동화로 운전 기사 없이 운행된다. 전철 내부 공간은 좁았다. 서로 마주보는 양쪽 의자사이는 사람이 서서 있는 여유는 거의 없었다.

 

  전철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니 보쥬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 가운데에는 원형으로 물줄기가 내려오는 분수대가 있었다. 사방은 붉은 벽돌의 고풍스러운 저택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곳은 왕족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당시에는 왕실 광장으로 불렸다고 한다. 사람들이 잔디와 벤치에 한가로이 앉아서 책을 읽거나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광장 구석으로 걸어가니 빅토르 위고의 집이 나타났다. 이곳은 그가1832년부터 1848년까지 16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창문을 통해 광장에 있는 분수와 사람들을 바라보며 글의 구상을 하였으리라. 이곳에서 레 미제라블을 집필했다. 여기서 레 미제라블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나폴레옹 3세때 망명생활을 시작하였고 룩셈부르크에 있는 비안덴에서 그 소설을 마무리 지었다.

 

  입장료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위고의 집을 관람하는 것은 무료였다. 계단으로 올라갔는데 고풍스럽고 위엄스러우며 화려하게 느껴졌다. 방은 전부 7개로 이루어 져 있다. 망명전 대기실이 있고 가족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망명 중 중국식 거실을 재현해 놓은 방도 있는데 중국 도자기가 전시되어 있고 벽도 중국 스타일의 예술 작품으로 덮여 있다. 식당이 있고 작업실에는 로뎅이 조각한 위고의 조각상이 있으며 위고가 그린 데생 작품도 있으며 그가 써놓은 윈고도 있다. 침실은 빅토르 위고가 1885 5 22일 죽음을 맞이한 침대가 놓여있다.

 

  빅토르 위고는 가족의 비극이 있었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훌륭한 소설을 썼다. 큰아들은 태어난 지 3달 만에 죽었고, 큰딸은 19살 나이에 남편과 함께 배가 뒤집혀 익사했으며 다른 두 자녀도 병으로 죽었다. 막내 딸만 있었으나 그녀도 23살 때 자살을 기도한 후 실어증에 걸렸다. 위고가 죽을 무렵에는 손녀 잔이 그를 돌봤다.

 

  위고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에 나가는 사회 참여 작가이다. 그는 민중 예술을 추구했고 인도주의 적이며 소설속에서 노동자들을 위하는 글을 썼다. 나폴레옹 3세의 쿠테타에 반발하며 해외로 망명을 떠난다. 그는 망명생활 중에서 프랑스 6월 봉기를 소재로 한 레 미제라블을 완성했다.

 

  위고는 그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개인의 욕망에 눈이 어두워 살인까지 저지르는 프롤로 주교를 묘사한다. 그런 소재들로 인해서 카톨릭과 불화가 생기고 끝내 화해하지 못한다. 그의 마지막 유언에는 교회의 추도식은 거부한다. 영혼으로부터의 기도를 요구한다.’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빅토르 위고의 집을 다 구경한 후에 층계로 내려오니 1층에 카페가 있었다. 마로니에 나무들이 군데 군데 있었고 나무 밑에는 낙엽들이 쌓여져 있었다. 의자와 테이블은 온통 주황색이었다. 카페는 고풍스러운 저택에 둘러 쌓여 조그만 한 곳이 밑으로 내려앉은 듯한 느낌이었다. 한적하고 조용하였다.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혼자 사색에 젖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사방으로 보이는 저택들 안의 한곳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는 카페, 어서 빨리 앉고 싶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서 빅토를 위고를 생각하며 과거를 회상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다녀온 카페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아늑했고 더 오래도록 있고 싶었다.

 

  이곳은 파리에 오면 가 볼만 한 곳이다. 거리도 가깝고 가기도 쉽고 입장료도 없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더 여유로운 시간을 내서 오고 싶다. 보쥬 광장 벤치에 앉아 책도 읽고 사색도 하고 싶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계절이 주는 멋을 느끼며 한껏 과거의 정취로 빠져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