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 교육, 한국식 교육

 

 

   미국에 와서 아이를 키우다보니, 혼란스러운 것은 아이가 아니라 나인 것 같다.

큰 애는 대학까지 한국에서 나왔지만, 고등학교 때 교환학생으로 십 개월 간 미국교육을 경험했고, 작은 애를 데리고 내가 유학하는 동안에도 집 근처의 주립대학에서 방문학생으로 수업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미국식 교육에 어느 정도 노출되었던 탓인지, 이 녀석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상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작은 애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윽박지르기가 통하지 않는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한 달 전 큰 애가 자동차 접촉 사고를 냈다. 사고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어깨에 천사가 앉아 있었나 보다”고 말할 정도로 위험한 사고였다. 천사의 도움으로 애는 무사했지만, 차는 폐차되었다. 새 차 구입비용으로 나는 아이에게 예산 만 불을 책정해 주었다. 대략 알아보니, 그 정도면 7,8년 된 평범한 중고 세단을 살 수 있는 가격이었고, 그만하면 애가 대학원 졸업 후 취업 때까지 무난히 쓰겠거니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몰고 온 차는 소형 컨버터블이었다. 2인승인데다가 기어는 수동이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이걸 어떻게 운전할거야?” “비실용적이잖아! 자전거(너무 작아서 두 사람 타기도 버거워 보인다는 나의 빈정거림)를 사왔군!”  나는 마구 화를 냈고, 아이는 어리둥절해 하며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를 준 거야?” 그 때서야 애가 말을 하기 시작한다. 8천불. 세금 포함하니 얼추 만 불이란다. 아이의 설명은 이렇다.

   본인이 갖고 싶은 차는 컨버터블이었다. 엄마가 정해 준 예산은 만 불이었고, 만 불로는 도저히 맘에 드는 차를 구입할 수가 없었단다.  게다가 오토 기어는 2천불 정도를 더 주어야 했다. 고민 끝에 수동운전을 배우기로 했다.  그리고, 십 년도 넘은  컨버터블을 떡! 하니 데려 온-가져 온 게 아니고- 것이다.  

 

   사실 나의 한국식 사고로는 아이가 졸랐다면, 큰 무리가 안 되는 범위에서지만 물론, 2천불을 더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십 년이 넘은 차는 안 샀을 테고, 좀 편리하게 오토기어 차를 살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자동차 구입은 아이의 안전을 담보로 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애가 듣기 싫어 할 소리는 했겠지만, 나는 마음이 약해져서 돈을 더 줬을 게 뻔하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다고! 그러나 미국 물(?)을 먹은 아이는, 본인이 돈을 버는 것도 아니면서 부모가 만 불이라는 큰돈을 이미 주었는데 거기에다 돈을 더 달라하자니 염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차에 대해 불평하면서 이 얘기를 미국에서 오랫동안 교사 생활을 하셨던 지인께 해 드렸다. 내 요점은 애가 허영끼가 있고 융통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분의 답은, 아이가 부모와 대화하는 법을 아네, 였다. 부모에게 조르는 대신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 고심했고, 수동을 배우겠다는, 이미 배우고 있는 노력을 하지 않느냐고 하셨다. 엄마가 정해 준 것은 예산이었지 차종을 못박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도 하셨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방법을 찾았고, 그 선택으로 인한 불편함을 본인이 기꺼이 감수하는 태도는 칭찬할 만하다는 것이다. 

 

   미국 교육은 어느 과목을 막론하고 토론과 글쓰기를 많이 시킨다. 이때 강조하는 것이 첫 째, 사람과 그 사람의 의견을 구분하는 것이며 둘째, 책임감이고 셋째, 지적 겸손함이다. 이 지적 겸손은 비판이나 비평을 할 때 논리보다 우선하여 가르치는 덕목이다. 미국에서 지식인이라 함은 적어도 이 세 가지 덕목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성급한 다그침을 대하는 아이의 대화법은 논리적이고 성숙했다. 겸손함도 지녔다. 나는 그 후에도 차를 바꿔오라고 종용했고, 아이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네가 돈 벌어 차 살 수 있을 때까지 더 이상 차는 못 사준다고 나는 여러 차례 다짐을 놓았고, 아이는 자신의 선택과 엄마의 억지를 수용했다. 

   내 고집을 빼고 보면, 하얗고 조그만 컨버터블  요 녀석, 새침한 것이 우리 딸과 참 잘 어울린다.  책임을 요구하는  미국식 교육과  한국 부모의 캥거루식 애정이 충돌했던 일이었다. (14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