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情理
유숙자
우편함을 열 때면 마음이 설렙니다. 요즘은 손 글씨로 쓴 우편물이 드물기에 행여 어떤 의외의 카드 한 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까 해서이지요. 언젠가부터 카톡, 텍스트 메시지가 주를 이루며 손으로 쓴 우편물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가 적성에 맞는 나는 밤늦게까지 카드 쓰느라 분주했던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합니다.
오늘, 우편함을 여는 순간 익숙한 손 글씨의 카드 한 장이 나를 반겨주었습니다. 한국을 떠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때에 맞춰 크리스마스카드와 생일 카드를 보내 주는 친구의 성탄 카드입니다. 생년월일이 같다는 인연으로 늘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세월 품을 파는 친구는 나를 향해 별빛처럼 반짝이는 사람입니다.
큰아이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 서예 교실에서 붓글씨를 함께 배우던 어느 학부모와 태어난 해와 달과 일이 같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내가 세상 밖으로 나와 첫울음을 터뜨렸던 그날, 그도 어디선가 고고성을 울렸고 37년 후 만났다는 사실이 신비를 넘어 기적 같았습니다. 우리는 두터운 친분을 쌓아 갔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몇 년 후 남편이 런던 지사로 발령을 받아 우리 가족이 한국을 떠나던 그해부터 친구는 절기에 맞는 카드를 보내 주었습니다.
주는 마음, 그것은 넉넉하고 기쁨으로 가득찬 샘물 같은 마음입니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상대를 배려하며 맑은 세상을 가꿔가고 있음에 응원을 보냅니다. 가장 부유한 마음의 소유자가 베풀 수 있는 자아실현입니다.
오래전 유학 와 있는 아들을 만날 겸 이곳을 방문했을 때 봉숭아꽃 다진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직접 내 손가락에 물들여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도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 속에 빨갛게 잘 익은 꽈리 2개를 보내 주었습니다. 유년의 풍성한 꿈을 심어 주던 고향의 가을이 그립고, 줄기째로 한 다발 묶어 벽에 걸어두고 장식하던 꽈리가 눈에 어린다고 했던 그해 겨울이었습니다. 열매 반입이 불법이라는 것을 나도 친구도 몰랐던 시절 꽈리는 무사히 내 품에 안겼습니다. 세월이 흘러 다홍색이 갈색으로 변하고 다시 거무스름하게 될 때까지 꽈리는 컴퓨터 옆 작은 쟁반에 고이 담겨 고국에의 향수를 달래 주었습니다.
몇년 전 초여름 한국 방문을 알렸을 때 친구는 화분에 상추씨를 뿌려 두었다고 했습니다. 화분 세 개에서 자란 상추는 먹기 좋을 만큼 크기로 자랐습니다. 상추잎에 불고기를 얹어 먹으니, 상추의 풋풋한 향기가 친구의 정성과 어우러져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그때 건네준 고급스러운 식탁보는 바느질하기도 힘든 겹 노방을 한땀 한땀 손으로 박음질하여 만든 예술품입니다. 너무 귀하여 아직 사용하지 못하고 장식용으로 품위를 뽐내고 있습니다. 정리 情理를 오래오래 지켜주는 친구입니다.
내 삶의 여백에 자리한 친구와 기탄없이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은 언어가 엮어 내는 단순한
정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진정으로 서로 이해하고 신뢰한다는 것이 인간의 존재를 아름답게 보이게 했습니다. 하여 삶의 뜨락에서 캐어낸 맑고 평범한 일상사라도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눌 때보다 카드 속 이야기는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소리였기에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상황도 글로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시간이 거리를 좁혀 주었습니다.
겨울비가 살포시 내립니다. 눈이 소복히 쌓여 있는 친구의 성탄카드를 다시 봅니다.
방울져 떨어지는 빗방울을 하얀 눈송이의 환영으로 바라봅니다. 밝아 오는 새날에도 그리움으로 이어질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비 내음이 향기처럼 드리우는 한 해의 끝자락, 만날 날을 고대하며, 복된 날들로 이어지는 새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2023년 세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