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구 행복동 / 권민정
조세희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 코로나에 걸린 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작가가 꿈꾸던 세상. 사랑으로 자식을 키우고,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고, 사랑으로 일하는,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 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하는 세상을 그리며 눈을 감았을 것 같다. 그가 쓴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100쇄를 찍었던 해, 그는 “한 작품이 100쇄를 돌파했다는 것은 작가에겐 큰 기쁨이지만 더 이상 <난쏘공>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320쇄를 돌파하고 누적 발행부수가 150만 부에 이르는 현재의 사태를 본다면 그는 뭐라고 말을 할까?
나는 2008년에 발행된 106쇄 소설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연작소설 12편 중 네 번째 발표된 작품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처음 읽은 것은 1976년 겨울이다. 한 문예지에 발표된 그 소설을 읽으며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그 이야기는 일 년 전에 내가 직접 겪고 경험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난쏘공> 이야기 속, 바로 그때 현장에 있었다. 그 동네 교회에서 운영하던 어린이집 교사를 했었고, 철거가 시작된 후에는 지역조사 담당직원으로 일했다. 청계천 판자촌은 하천을 따라 수만 채의 판잣집들이 들어서 있던 동네였는데 한양대학교 뒤편, 송정동 지역 판자촌이 1975년 6월부터 먼저 철거가 시작된 것이다. 그때 주민들은 정말 갈 곳이 없었다.
소설 속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난장이네 집이 있는 곳은 낙원구 행복동이다. 그 집은 방죽가에 지어진 무허가 건물이지만 좁은 마당도 있고, 그 마당에는 팬지꽃이 핀 꽃밭도 있다. 집을 지을 때 난장이와 그의 아내는 도랑에서 돌을 져 와서 그것으로 계단을 만들고 벽에도 시멘트를 쳤다. 세 명의 아이들이 그 집에서 자라났고, 방 한 칸은 세를 주었다. 선거 때가 되면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떼를 지어 동네를 돌며 동네사람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그들은 개천에는 다리를 놓고 도로를 포장하고, 동네 집들은 양성화 시켜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 동네에 무허가 건물 철거 명령이 떨어졌다. 아파트 입주 권리가 주어졌다. 분양아파트는 50만 원, 임대아파트는 30만 원만 내면 된다. 시에서 주는 이주보조금은 15만 원이다. 임대아파트의 경우 15만 원만 더 있으면 아파트 주인이 된다. 그러나 난장이 네는 이주보조금 15만 원을 받으면 세든 사람에게 그 돈을 내주어야 한다. 15만 원에 세를 놨으니까. 오롯이 30만 원이 있어야 임대아파트라도 들어갈 수 있다. 낙원구 행복동에 사는 주민들 대부분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난장이네 가족 5명도 모두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난장이는 수도 고치는 일, 아내와 이제는 장성한 아들들은 공장에서, 딸은 빵집에서 일한다. 그러나 박한 임금 탓에 아직 모아 놓은 돈은 없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입주권을 팔 수밖에 없다.
이 내용들은 소설 속 허구가 아니라 바로 사실 그대로였다. 그때 잠실 아파트 입주권이 집주인에게 주어졌는데 입주에 필요한 돈을 마련할 수 있는 집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 투기꾼의 손에 딱지로 팔려 나갔다. 판자촌이 철거되면서 거기 살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하지만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때, 마치 돈키호테 같았던 목사님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혼자서 넘어진 것을 함께 뭉쳐서 일어나자.”고 외치며 절망한 그들에게 엑소더스(Exodus)의 꿈을 심어 주었다.
그때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에 갓 간척을 끝낸 땅이 있었다. 교회에서는 그곳에 가서 살게 해 달라고 정부에 탄원했다. 그러나 정부는 허락하지 않았다. 판자촌에 사는 사람들을 믿을 수 없었다. 무능하고 나태하다는 인식이 뿌리 깊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런 중에도 정부를 설득하며 귀농 사업을 추진했다. 수많은 귀농 신청자가 몰려들었다. 그중 우선 1차로 100세대를 선정했다. 그들이 귀농하여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다는 증명 자료가 필요했다. 100세대 실태조사는 지역조사 담당자인 내가 맡았다. 조사 결과는 좋았다. 엄마는 행상으로, 아빠는 막노동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서울로 오기 전에는 대부분 농민이었다는 사실도 희망적이었다. 조사 결과는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정부에 제출하고, 개발도상국 지역개발 활동을 돕는 서독의 기독교 단체에도 보내 후원을 요청했다. 간척한 땅에서 소출이 나기까지 생활비, 개발비 등의 비용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교회에서 원하던 남양만 간척지를 정부가 청계천 사람들에게 내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곳이 지금의 남양만 두레마을이다.
교회와 100세대 귀농자가 남양만으로 떠나갈 때 나는 그곳에 따라갈 수가 없어 어린이집 교사를 하기 위해 휴학했던 학교로 복학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갔을 때 조세희의 소설을 읽은 것이다.
철거 당시, 그곳은 전쟁터 같았다.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쳐 판잣집을 부수면 주민들은 그곳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다시 철거반원들에 의해 그것마저 부숴지면 거기 남은 판자와 천막으로 다시 집을 지었다. 부수면 다시 짓고, 또 부수면 다시 짓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쟁터 같은 판자촌을 헤집으며 슬프고도 살벌한 전투를 지켜보았을 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 그런데 <난쏘공>을 읽으며 울고 또 울었다. 왜 그렇게 가슴이 미어졌을까. 시간이 지난 후 생각하니 그것이 문학의 힘이었다.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정서적 울림, 조세희의 소설은 독자에게 그것을 준 것이다.
조세희 작가가 꿈꾸던 세상을 생각하며, 사랑의 세계는 이 땅에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인지 생각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