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의 여행 / 조미순
민들레가 둥글게 몸을 부풀린다. 탁구공 같다. 바람이 불자 갓털이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아파트 화단과 길과 공터를 조감하듯 움직인다. 도로변 흙먼지 소복한 곳에 씨앗이 내려앉는다. 거기서 숙제를 해내야 한다. 노란 꿈을 꽃피우려면.
열 살이었다. 어른 눈치에 담긴 호오 감정쯤은 읽을 나이였다. 외숙모는 제인에게 조숙한 광대 같고 성깔 있는 이중인격 덩어리라 했다. 아이는 살얼음 밟듯 행동을 조심했다. 그날도 식당 창 커튼을 내리고 숨어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외사촌 오빠 존이 또 싸움을 걸어왔다. 서로 엉겼다. “저 애를 붉은 방에 가둬.” 외숙모의 날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하녀가 외삼촌 죽었던 방으로 끌고갔다. 밤이 되자 슬픔에 공포까지 더께진 아이가 발작을 일으키며 기절했다.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초인간적 위력에 의해 지배되는 걸 ‘운명’이라 한다. 운명은 힘이 세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읽으며 무기력한 꼬마 제인의 고난을 아프게 바라보았다. 삶의 주인 역할을 해낼 힘이 없으니 아이는 어른에게 기대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마치 갓털이 바람에 의지해야 할 때처럼.
며칠 전 용인의 허균묘를 찾았다. 능지처참당한 대역죄인인지라 누가 수습할 수도 없었던 그의 시신. 가묘 속 넋만 깃든 곳에 절을 하다 눈가가 찡했다. 무거운 걸음으로 허엽 일가 묘역을 서성였다. 그러다 60년대 후반 국어국문학회에서 세운 허난설헌 시비 앞에 걸음을 멈췄다.
영영창하란(盈盈窓下蘭)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지엽하분분(枝葉何芬芬) 가지와 잎 그리도 향기롭더니// 서풍일피불(西風一披拂) 가을바람 잎새에 한 번 스치고 가자/ 영락비추상(零落悲秋霜)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 (중략)
비석 뒷면의 5언 고시를 읽고 즉흥적으로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으로 차를 몰았다. 허난설헌의 묘소에 가보고 싶었다. 주차장 앞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마중 나오듯 묘가 바로 앞에 있었다. 소주 한 잔 따라 놓고 그녀를 추모했다.
19세기 영국의 분위기는 조선과 비슷했다. 여성의 순종과 희생을 당연시하고,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했다. 이런 시대 배경 속 제인은 고난을 이겨냈다. 독립적인 존재로서 생을 밀어 올렸다. 그 갓털은 힘껏 허공을 날았다.
조선 여인 난설헌의 삶은 제인의 생과 확연히 달랐다. 봉건적인 조선 사회에서도 딸의 재능이 빛나도록 배움의 길을 터준 아버지 허엽, 그는 열린 의식의 소유자였다. 거기에서 한 여성의 꿈이 샛노랗게 피고 있었다. 하지만 혼인을 경계로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 일반적인 때, 난설헌은 친영제에 묶이는 1세대가 되었다. 결혼 후 신부가 친정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한….
빛나는 재기를 가진 여인이 친정이라는 안식처를 잃었다. 여자가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시댁 사람들의 눈밖에도 났다. 아내에게 굴욕감을 느꼈던 남편 김성립까지 밖으로 나돌았다. 몸 붙일 곳, 마음 기댈 곳 하나 없던 여인. 물기조차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난설헌은 제 삶을 둥글게 부풀릴 수 없었다. 등을 내주던 ‘바람’이 떠나버린 처지라 날 수도, 뿌리를 내릴 수도 없었다. 당시의 제도와 사상이 그녀를 날개 꺾인 새로 전락시켰다.
읽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창밖을 본다. 어디선가 갓털 하나 날아와 창틀 구석에 앉는다. ‘영영창하란(盈盈窓下蘭)’ 같았던 그녀 생각이 나서 후~ 씨앗을 불어 손바닥에 올린다. 풀밭으로 가져간다. 이곳에서라면 틀림없이 꽃을 피울 것이다.
휘~익, 바람이 분다. 갓털이 난다. 글밭에 깊고 풍성한 뿌리 내리고픈 내 갈망도 거기에 얹혀있다. 등을 미는 바람의 손길이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