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뒷 모습 / 주자청(朱自淸)
아버지를 못 뵌 지 이년 여가 되었다. 그래도 가장 잊혀지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그해 겨울 할머니가 돌아가신 데다 엎친 데 덮진 격으로 아버지마저 실직했다. 나는 부음을 듣고 북경에서 서주(徐州)로 가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서주에 도착해 아버지를 뵙고 마당에 잔뜩 어질러진 물건들을 보자 할머니가 생각나 눈물이 나왔다.
“어쩌겠냐.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산 사람은 또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집으로 돌아와 가산(家産)을 처분해 우선 빚을 갚고 다시 빚을 내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때 우리집은 할머니의 장례와 아버지의 실직으로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장례가 끝나고 아버지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남경(南京)으로 가야 했고, 나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북경(北京)으로 돌아가야 해서 우리는 남경까지 동행했다.
남경(南京)에 도착해 친구와 함께 구경하며 하루를 머물렀다. 다음 날 오전에는 포구로 건너가 오후에 북경행 열차를 타야 했다. 아버지는 일이 바빠 나를 배웅하지 못하겠다며 잘 아는 여관 일꾼에게 나를 데려다 주라고 부탁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일꾼에게 재차 부탁하면서도 안심이 안 되는지 자꾸만 머뭇거리셨다. 사실 그때 내 나이 스무 살이었고 북경에 두세 차례 다녀온 적도 있어 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잠시 망설이시더니 결국 그래도 자신이 배웅해야겠다고 나섰다. 나는 안 오셔도 된다고 누차 말씀드렸지만 “괜찮다. 그래도 내가 가야지. 그 사람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하시며 따라오셨다.
우리는 강을 건너 기차역으로 갔다. 내가 차표를 사는 동안 아버지는 짐을 지켰다. 짐이 너무 많아 돈을 주고 짐꾼을 시켜 옮겨야 했다. 아버지는 짐꾼과 열심히 흥정하셨다. 당시 나는 지나치게 똑똑해 아버지가 말하는 게 서툴다고 생각해 참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쨌든 아버지는 가격 흥정을 끝내고 기차까지 나를 배웅해 주셨다. 아버지는 차창 쪽에 자리를 잡아 주셨고 나는 그 위에 아버지가 사주신 자주색 코트를 깔았다.
아버지는 조심해라, 밤에 깊이 잠들지 말아라, 감기 조심해라 등등 시시콜콜한 당부의 말을 쏟아내셨고 기차 안의 일꾼에게도 나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셨다. 나는 속으로 아버지의 조바심을 비웃었다. 돈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에게 부탁해 봐야 말짱 헛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내 일 하나 처리 못 할까 싶었다. 아,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나는 지나치게 총명했었다.
“아버지, 그만 가세요.”
아버지는 밖을 쳐다보더니 “귤 좀 사 와야겠다. 넌 꼼짝 말고 여기 있어라.” 하셨다. 창밖을 보니 저쪽 플랫폼 울타리 밖으로 몇몇 장사꾼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쪽까지 가려면 철로를 건너야 했다. 철로를 건너려면 선로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했다. 뚱뚱한 아버지가 가려면 꽤 힘들 것 같았다. 내가 가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나는 검정색 천 모자를 쓰고 감청색 파오에 검정색 마고자를 입은 아버지가 뒤뚱거리며 철로 곁에 가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때까지는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맞은편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게 문제였다. 아버지는 먼저 두 손으로 플랫폼을 짚고 두 다리를 위쪽으로 모아 올렸다. 아버지는 뚱뚱한 몸을 왼쪽으로 기울여 올라가려고 애를 썼다.
바로 그때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다. 나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행여 아버지가 볼까 두려웠고 다른 사람이 볼까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창밖을 보았을 때 아버지는 주황색 귤을 안고 돌아오고 있었다.
철로를 건널 때 아버지는 먼저 귤을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기어 내려온 다음 다시 귤을 집어서 안고 걸어 오셨다. 아버지가 이쪽 편에 도착할 때쯤 나는 재빨리 나가 아버지를 부축했다. 아버지와 나는 열차로 돌아와 귤을 내 가죽 재킷에 올려놓았다.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는 모습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신 것 같았다.
“이제 가야겠다. 도착하거든 편지해라.”
잠시 후 아버지께서 일어나셨다. 나는 아버지가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몇 걸음 옮기시더니 내 쪽을 돌아다보셨다.
“들어가라. 안에 아무도 없잖니.”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인파에 섞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있다 열차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요 몇 년 아버지와 나는 각자 분주하게 일했지만 집안은 갈수록 기울어져 갔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타지에 나가 일을 하시면서 굵직굵직한 일도 해내셨다. 하지만 말년에 이렇게 고생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아버지는 상심했고 자연히 자기 자신을 억제하지 못했다. 가슴속에 쌓인 울적함을 밖으로 분출하셨다. 아버지는 소소한 집안일에도 종종 화를 내셨고 나를 대하는 것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이년 여 동안 못 본 사이 아버지는 나의 잘못은 다 잊고 그저 나와 내 아들 걱정만 하셨다.
북경에 도착한 이후 아버지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편지에는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낸다. 팔의 통증이 심해 젓가락 들고 펜 드는 게 좀 불편할 뿐이다. 아무래도 갈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라고 쓰여 있었다. 여기까지 읽은 내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감청색 파오에 검정색 마고자를 입은 뚱뚱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아! 언제쯤 아버지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작가 소개
주쯔칭(朱自清, 1898.11. 22. ~ 1948. 8. 12.)
중국의 시인, 수필가. 청나라 장쑤성 둥하이현 출생으로, 1920년 베이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장쑤·저장의 여러 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학생시절 주로 신시(新詩)를 창작했으며, 장시 〈훼멸〉이 당시 문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24년 시와 산문을 모은 〈종적〉을 출판했으며, 1928년에 출판된 산문집 〈뒷모습〉으로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시와 산문은 어두운 현실에 대한 불만과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산문은 언어가 세련되고 문장이 유창하다. 산문집으로 〈구유잡기〉·〈너와 나〉·〈런던 잡기〉가 있으며, 문예론 저서로 〈시언지변〉·〈논아속공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