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애(作品愛) / 이태준

 

어제 경성역으로 부터 신촌 오는 기동차에서다. 책보를 메기도 하고, 끼기도 한 소녀들이 참새 떼가 되어 재잘거리는 틈에서 한 아이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흑흑 느껴 울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우는 동무에게 잠깐씩 눈은 던지면서도 달래려 하지 않고, 무슨 시험이 언제니, 아니니, 내기를 하자느니 하고 저희끼리만 재깔인다.​

 

우는 아이는 기워 입은 적삼 등허리가 그저 들먹거린다. 왜 우느냐고 묻고 싶은데 마침 그 애들 뒤에 앉았던 큰 여학생 하나가 나보다 더 궁금했던지 먼저 물었다. 재재거리던 참새 떼는 딱 그치더니 하나가 대답하기를,​

 

“걔 재봉한 걸 잃어 버렸어요.” 한다.

“학교에 바칠 걸 잃었니?”

“아니야요. 바쳐서 잘 했다구 선생님이 칭찬해주신 걸 잃었어요. 그래 울어요.”​

 

큰 여학생은 이내 우는 아이의 등을 흔들며 달랜다.​

 

“얘, 울문 뭘 허니? 운다구 찾아지니? 울어두 안 될 걸 우는 건 바보야.”​

 

이 달래는 소리는 기동차 달아나는 소리에도 퍽 맑게 들리어, 나는 그 맑은 소리의 주인공을 다시 한 번 돌려 보았다. 중학생은 아니게 큰 처녀다. 분이 피어 그런지 흰 이마와 서늘한 눈은 기동차의 유리창들보다도 신선한 처녀다. 나는 이내 굴속으로 들어온 기동차의 천장을 쳐다보면서 그가 우는 소녀에게 한 말을 생각해 보았다.​

 

“얘 울문 뭐하니? 운다구 찾아지니? 울어두 안 될걸 우는 건 바보야.”​

 

이치에 맞는 말이다. 울기만 하는 것으로 찾아질 리 없고, 또 울어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우는 것은 확실히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울음에 있어 곧잘 어리석어진다. 더욱 이 말이, 여자로도 눈물에 제일 빠른 처녀로 한 말임에 생각할 재미도 있다. 그 희망에 찬 처녀를 저주해서가 아니라 그도 이제부터 교복을 벗고 한번 인간제복으로 갈아입고 나서는 날, 감정 때문에, 혹은 이해 상관으로 '울어도 안 될 것'을 울어야할 일이 없다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신촌역을 내려서도 이 ‘울문 뭘 하니? 울어두 안 될 걸 우는 건 바보야’ 소리를 생각하며 걸었다. 그러나 이 말이나 주인공은 점점 내 마음속에서 멀어가는 대신 점점 가까이 떠오르는 것은 그 재봉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소녀이다. 그는 오늘도 울고 있을 것 같고 또 언제든지 그 잃어버린 조그마한 자기 작품이 생각날 때마다 서러울 것이다. 등허리를 조각조각 기워 입은 것을 보아 색헝겊 한 오리 쉽게 얻을 수 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어머니께 조르고 동무에게 얻고 해서 무엇인지 모르나 구석을 찾아 앉아 동생 보지 않는다고 꾸지람을 들어가며 정성껏, 정성껏, 마르고, 호고, 감치고, 했을 것이다. 그것이 여러 동무의 것을 제치고 선생님의 칭찬을 차지하게 될 때, 소녀는 세상일에 그처럼 가슴이 뛰어본 적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하교(下校)만 하면 어서 집으로 가서 부모님께도, 좋은 끗수 받은 것을 자랑하며 보여드리려던 것이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 소녀에게 있어선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요 작은 슬픔이 아닐 것이다.​

 

나도 작품을 더러 잃어버렸다 도향이 죽은 이듬해인가 서해 형이 《현대평론》에 도향 추도호를 낸다고 추도문을 쓰라고 하였다. 원고 청이 별로 없던 때라 감격하여 여름 단열 밤을 새어 썼다. 고치고 고치고 열 번은 더 고쳐 현대평론사로 보냈더니 서해 형이 받기는 받았는데 잃어버렸으니 다시 쓰라는 것이다. 같은 글을 다시 쓸 정열이 나지 않았다. 마지못해 다시 쓰기는 썼지만 아무래도 처음 썼던 것만 못한 것 같아 찜찜한 것을 참고 보냈다.​

 

신문, 잡지에 났던 것도 미처 떼어두지 않아서, 또 떼어뒀던 것도 어찌어찌해 없어진다. 누가 와 어느 글을 재미있게 읽었노라 감상을 말하면, 그가 돌아간 뒤에 나도 그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어 찾아보면, 찾아내지 못한 것이 이미 서너 가지 된다. 다시 그 신문, 잡지를 찾아가 오려오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꽤 섭섭하게 그날 밤을 자곤 하였다.​

 

이 ‘섭섭’을 꽤 심각하게 당한 것은 장편 「성모」다. 그 소설의 주인공 순모가 아이를 낳아서부터, 어머니로서의 애쓰는 것은 나도 상당히 애를 쓰며 썼다. 책으로는 못 나오나 스크랩채로라도 내 자리 옆에 두고 싶은 애정이 새삼스럽게 끓었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위에 기동차의 소녀처럼 울지는 않았다. 왜 울지 않았는가? 아니 왜 울지 못하였는가? 그 작품들에게 울 만치 애착, 혹은 충실하지 못한 때문이라 할 수밖에 없다. 잃어버리면, 울지 않고는 몸부림을 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작품을 써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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