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미해안길 / 송정자

 

 

여인의 유려한 허리 곡선이 낭창낭창 65구간이나 굽이쳐야 닿을 수 있는 길이다. 비단자락처럼 펼쳐진 해안, 남녘 바다 끝의 남해, 물건마을에서 미조항으로 접어드는 삼십 리 구간을 물미해안길이라 부른다.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

지난여름 푸른 상처

온몸으로 막아주던 방풍림이 얼굴 붉히며

바알갛게 옷을 벗는 풍경

남해 출신 고두현 시인은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의 시에서 철철 넘치는 그리움을 담아내었다. 시인의 길인 물미해안길 끝자락에는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같은 노을이 잠든 지 이미 오래였다. 바람난 봄볕처럼 허겁지겁 짐을 싸서 도망치듯 길을 나선 터였다.

오월의 황금연휴에 묶여 수도권에서 아홉 시간이 넘도록 지치지도 않고 찾아온 길, 그 누구도 기다리지 않은 남해에서 온전히 나를 받아주던 길, 수억 광년을 달려온 별빛이 하나가 되어 은하수를 이루며 맞아준 물미해안길이다. 우리나라 남쪽바다를 통틀어 상징하는 남해(sea)의 남해(island)섬. 가파른 암벽을 끼고 섬 길에 오른, 삶의 빛을 따라 유구히 흘러가는 해안길이다.

꼬불꼬불한 뱀 꼬리가 요동치는 길을 수십 바퀴 돌아야 한다. 반대편 차가 없을 때는 차선을 넘어 부채처럼 휘어지는 조심성이 필요하다. 절벽에 바짝 붙으면 차바퀴가 휘청거릴 수도 있다. 천혜의 비경인 우리나라 해안길 중에서도 으뜸가는 물미해안길의 절경을 쉬이 지나가도록 해 두었겠는가. 깜깜한 암벽 길에 바람이 마음먹고 켜 놓은 불빛 때문일까. 밤바다의 빛깔에도 익어가는 봄기운이 스며들어서일까. 낯선 길인데도 낯설지가 않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점점 고단해져 갔다. 특별하고 귀한 만남일 줄 알았던 사람 관계가 형편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천둥소리를 내며 다가왔던 인연도 한낱 여치소리만큼이나 낮아져 소리 없이 사그라져버렸다. 사는 게 몹시도 허탈해 불현듯 길 떠난 여행자에게 물미해안길은, 안개 속에서 그 어떤 실오라기 장치하나 없이 맨살의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다 벗어던지고 나에게 올래' 푸른 바다가 읊조리듯 바람결에 건네는 다감한 음성에, 목이 메고 가슴 밑둥까지 서러움이 파고든다. 성서에 예수께서 모두 사랑하라 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 하셨다는데, 그 어느 쪽도 서툴기만 했던 나에게 고개 끄덕여주는 물미해안은 늦은 봄날에 내려주신 신의 보속일까.

남해살이가 시작되었다. 다채로운 물미해안이 포구를 감싸고 있는 마을부터 훑어갔다. 어촌마을 어귀에 닿을 때마다 바람의 냄새가 다양하고 바다색깔이 다르다는 것에 진한 섬 기운이 스며든다. 송정 솔바람 해변, 방조어부림이 있는 물건항을 지나 은점마을과 대지포, 노구마을을 지나면 항도마을에 이른다. 몽돌해변을 걷다가 자르르 자지러지는 몽돌이 무리지어 발바닥을 간질거리면 두 팔은 허공을 휘젓고 있다. 파도에 씻겨 투명한 유리알 같은 초전몽돌해변까지 닿으면, 해는 느긋하게 기다려주지 않았다. 홍시 속살 같은 노을이 어느새 고개를 기웃거린다. 낮은 파도에도 찰박거리는 노을을 이 곳에서 볼 수 있을까.

미조항에서는 어느 곳을 목적지로 삼아도 마음씨 넓은 물미해안길을 거쳐 야 한다. 봄 햇살에 꾸벅꾸벅 오수에 들다가도, 밤바람에 잠시 몸을 누이다가도, 어느 때고 벌떡 일어나 품을 내어주는 살가운 길이다. 사랑하는 이의 가슴팍같이 다정하다가 때로 변덕스런 그의 품처럼 형상이 달라지기도 한다. 어떤 날은 짙은 침묵 속의 장승같을 때도 있다. 또 다른 날은 낯익고 친절한 이웃처럼 곰살맞게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그럴 때 물미해안길의 환한 마중은 그 어느 극락정토가 이보다 더 구체적일 수 있으랴. 그러다가 비가 오고 폭우가 쏟아지면 금방 집어 삼킬 듯 시퍼렇게 나를 불러다 앉힌다.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남해의 끝 쪽 바다조차 한없이 보듬어주다가 또 뜨끔하게 눈을 흘긴다.

어쩌다 알라딘의 램프 속 거인의 그림자처럼 밀물이 해변을 포획할 때가 있다. 조잘거리는 몽돌을 덮치려 허연 거품을 입에 문 물결은, 더 이상 햇살에 아장대며 다가오는 친절이 아니었다. 사람을 만나 인연을 만들고, 그로 인해 마음이 절룩거리고, 못다 해준 것에 연연해하고, 오만 가지 잡념이 여름 한 철 용광로처럼 들끓는 이방인에게 따끔한 경고를 주려함인가. 세상살이에서 무엇이든 물색없이 떠안으려는 나의 대책 없는 신뢰감에 날선 경계심을 심어주고자 하는 것일까.

인기척조차 없는 물건항 밤 바닷가를 거닐었다. 저녁노을의 잔광이 아스라한 방파제에서 두어 분이 찌를 드리우고 밤낚시에 빠져있다. 싸아한 밤공기를 뚫고 달려오던 파도가 칠흑 같은 정적에 움찔한다. 물방울처럼 부풀어 오르는 눈물을 감추려니 어스름한 달빛 아래가 제격이다.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 매본 사람은 알게 된다는 노랫말도 있지 않은가. 누군가의 관심이, 누군가의 다가옴이, 누군가의 세레나데가 얼마나 만지고 싶은 사람의 얼굴인가를. 바다도 외로울 때가 있을까. 오랜 세월 파도에 쓸리고 굴곡진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저 바다가 말을 걸어온다면, 나는 지체 없이 그 품속으로 뛰어들 수 있으련만. 바다가 목이 마르다면 부르튼 입술로 기꺼이 입맞춤 할 수도 있으리라.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굼틀대는 물미해안길이 풀어놓은 심곡의 길에서 잠시 멈칫한다. 이대로 넉넉한 가슴에 안겨볼까. 이 곳에서는 잎줄기에서 떨어져서도 향기를 잃지 않는 꽃이 될 수 있을 것을. 여신 아프로디테가 피그말리온의 지극적인 사랑에 감동하여 그의 조각인 갈라테이아여인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었듯이, 간절한 나의 여망도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어느 새 남해 한달살이가 끝나갈 때 그 간의 인연 때문인가. 물미해안길이 고조 곤히 들려준다. 자꾸만 뒷걸음치는 나에게, 세상에다 등만은 돌리지 말고 저 앞바다를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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