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게 서럽게 물든 세월

유숙자

비가 내린다.

모처럼 내리는 비가 유리창을 두드리며 내리흐른다.

세찬 바람에 자지러질 듯 흔들리는 나뭇잎, 세월을 갈마들며 물들고 잎 진 사이로 비를 좋아하는 친구의 환영이 어른거린다. 금방이라도 문을 두드리며 들어설 것 같다. 말과 글과 행동이 일치해야 지식인이라고, 명확한 삶을 꿈꾸며 희망하는 존재로 살고 싶다던 친구가 앞으로 얼마나 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상실과 소외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알츠하이머 진단이 나왔습니다. 진작 말씀드리려 했으나 저도 너무 충격이 커서 차일피일했던 것이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많은 검사를 거쳤기에 나름대로 전문의와 상의한 후 거취를 정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이후에는 소식을 전하지 않을 겁니다. 사리 분명하고 멋진 친구로 기억해 주십시오. 말은 하지 않아도 아내도 그것을 원하고 있을 겁니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친구 남편의 전화이다.

 

언제부터인가 감정선에 변화가 있음은 예감했으나 나이 들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증상이거나 일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더 강한 삶의 의지일 수 있을 것이라 받아들였다. 코비드 19로 인해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데다가 시력이 좋지 않은 친구는 행동에 제한을 받아 주로 전화로 안부를 전했고 근래 들어 전화마저 뜸해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 

누구보다도 예민한 친구가 그동안에 느꼈을 괴리감과 절망을 생각하니 가슴이 조여 온다. 10살 20살을 같이 보내며 진정한 영혼의 만남이었음을 감사하며 살아온 세월에 무수히 잎을 떨구면서 물든 74년이 이제 낙엽 되어 떨어진다. 

 

1950년 6.25 전쟁이 나던 해 피난민 초등학교 5학년 교실에서 만난 우리는 10살이었다. 전쟁 속에서 폭격 소리를 들으며 공포가 무엇인지 알았기에 나이에 비해 조숙하고 차분했다. 그도 나도 말수가 적어 초등학교 시절에는 주로 편지로 마음을 표현했다. 1년 좀 넘게 공부하고 여학교로 갈 때 지원한 학교가 달라 헤어졌다. 그때 친구에게 한 선물이 아뽈리 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이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가 흐르고 /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내린다

그리움에 이어 맞을 보람을 / 나는 꿈꾸며 기다리고 있다

해야 저무렴 종도 울리렴 / 세월은 흐르고 나는 머무네’ 

‘그리움에 이어 맞을 보람을 나는 꿈꾸며 기다리고 있다' 이 표현이 좋았다. 먼 훗날 학부에서 다시 만날 것을 꿈꾸며 기다리고 있다는 은유로 택한 시이다. 

 

어쩌다가 둘 다 중학교 1차 입시에 실패하여 2차에서 다시 만났다. 1차 낙방이 부끄럽고 창피하였으나 6년 후가 아닌 곧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반가워 온갖 시름을 잊었다. 우리의 만남을 운명적이라는 말을 쓰며 기뻐했다. 

친구들은 우리를 짝지라고 불렀다. 외모나 행동, 취미와 성격이 비슷하고 늘 붙어 다녔기에 붙여준 별명이다. 친구는 모든 면에 어른스러웠다. 문예반에서 박목월 선생님께 시를 공부했을 때도 친구의 시는 눈부시게 신선했고 어떤 향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한편, 친구는 편치 않은 가정사로 힘들어하며 때로 많이 우울했다. 

여고 시절 어느 늦은 여름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가 보니 비를 흠뻑 맞은 친구가 후줄근한 모습으로 서 있다가 나를 보자마자 쓰러졌다.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마침 어머니가 소란을 듣고 나오셔서 친구를 부축해 방에다 뉘었다. 따뜻한 물을 마시게 하고 한동안 진정시킨 후에 자초지종을 물었다.

‘동작동 국립묘지를 다녀왔어. 비 오는 날이면 국립묘지에 가고 싶어. 어느 묘지에 앉아 한동안 영혼과 대화를 나누었어. 한참 만에 정신 차리고 사방을 둘러 보니 비는 멈추고 하늘에 별이 총총해서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어. 갑자기 섬뜩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어 달려 나왔는데 어떻게 너의 집까지 왔는지 생각이 안 나.’ 이 말을 들으며 소름이 돋았으나 한편 한없이 측은한 마음이었다. 친부의 계신 곳을 몰라 아무 묘지에 앉아서 대화를 나눈다는 친구. 그날 어머니는 친구를 위해 기도해 주셨고 우리는 편안히 잠들었다.  

어릴 때 들은 이야기로 아버지가 전사하셨고 국립묘지에 묻히셨을 거라고 누군가 말해 주었으나 엄마가 재가하시는 바람에 묻혀둔 이야기로 살았다고 했다. 친구는 이상하게 비 오는 날이면 그곳에 가고 싶어 어머니 몰래 다녀 오곤 했단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혼신을 다한 유능한 남편 덕분에 춥고 외로운 신혼 생활이었지만, 잘 자라 준 삼 남매로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다. 유학생으로 뉴욕에서 미술 공부를 하던 장남이 결혼 6개월 만에 불치병으로 이혼하고 그 아들로 인해 친구의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고 정착했다.

꿈 같은 재회를 기뻐하기 이전에 죽음이 임박한 아들로 고통받는 친구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밀알선교회 회원인 친구 아들은 세상을 떠나기 전 회원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희망을 드려요> 그림 제목이다. 푸른 들판에 튼실하게 서 있는 한 그루 나무. “사랑을 나누고 싶어 희망을 그렸습니다. 붓을 들었던 순간 행복했던 제 마음이 모두에게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전시회를 찾았다. 어릴 때 밝고 씩씩하던 모습이 그림에 어른거리고, 엄마의 기쁨으로 성장하던 시절이 오버랩되어 눈시울이 젖는다. 화폭에는 평화로운 풍경에 튼실한 나무를 그렸지만 어쩌면 자신 내면에서 바라고 원하는 염원을 담아낸 것이 아닐까. 나무처럼 건강한 모습을 꿈꾸며 이제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했던 기억을 추억의 이야기로 풍성하게 채우고 싶어서.

그림 밑에 선명하게 붉은 동그라미표를 붙여 놓고 나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아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그 그림은 2012년 재미 수필문학가협회 연회지 ‘재미수필’ 14집 표지로 사용하여 친구 모자에게 기쁨을 안겨 주었다.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눈이 잘 보이지 않아도 긴 세월 변함없는 사랑으로 기도 같은 삶을 이끌어 간 친구. 친구는 기쁨과 괴로움의 인생길 연륜에 줄무늬를 그은 사이사이 시를 새겨둔 채 허허로운 마음으로  떠났으리라.

그립게 서럽게 물든 가을이 내리고 있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