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을 앓다 / 김영인
가지 끝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스러졌다. 아직 오월은 며칠이나 남아 꿈틀거리는데, 뜨거움을 감당 못해 쏟아낸 것일까. 한 잎 한 잎 떼어 뿌려놓은 듯한 꽃잎들이 담장 위에서보다 붉다. 무심하게 내딛는 발걸음에 즈려밟힌 검붉은 울음들이 소리 하나 없이 가볍다.
오월, 꽃단장한 나의 외출은 화사했다. 담장 가득 피어 나들이 가는 내 뒤꽁무니에 향기 풀풀 날려주는 꽃 때문이었다. 그 꽃그늘 아래를 걸을 때면 괜스레 더 화사해져 만개 직전의 꽃송이 하나 꺾어 들고 콧노래 장단으로 걸었다. 꽃처럼 붉어지고 싶었다.
봄이면 온 천지에 꽃물이 넘쳤다. 나의 손길이 아침마다 닿은 작은 뜰에도 피고 지는 꽃의 행렬이 여름 문턱까지 이어졌다. 수선화, 모란꽃, 라일락, 죽단화, 싸리꽃, 작약꽃, 달맞이꽃, 석류꽃, 넝쿨장미꽃…. 그중 터질 듯 타오르는 불꽃은 넝쿨장미꽃이었다. 장미꽃은 허공과 허공 사이에서 절정을 태웠다. 붉음도 뚝뚝 떨어트렸다. 나를 마취시키는 장미의 매력이 궁금해졌다.
귀가 때 골목에 들어서면 담장 위 장미는 단내 가득한 햇살 머금은 채 샛바람을 타며 놀았다. 어느 때는 지나가는 구름 조각 한입 떼어 녹였고, 어느 밤에는 하나둘 별을 세는 눈빛이 흔들렸다. 어느 날에는 오월 단비에 흠뻑 젖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내 발걸음의 보폭도 커졌다 작아졌다.
오월은 ‘핌’의 환희와 ‘짐’의 슬픔이 교차하는 달이다. 이제 장미꽃은 여름에게 자릴 내줄 시간이다. 지붕까지 오르려던 희망도 그만 풀어낸다. 시들어가는 꽃잎은 곡선으로 떨어트리고 뒤척이는 여린 꽃송인 서둘러 깨워 세운다. 그 푸른달이 다하면 나는 누리달의 잔치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나의 오월을 열어본다. 아이를 들쳐 안고 친정에 내려간다.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과수원을 돌며 엄마를 부르면 멀리서 음성이 들린다.
“왔냐?”
소리 나는 곳을 찾아 달려가면 일찍이 홀로 된 엄마는, 젊음 한 조각 남은 엄마는, 수건을 머리에 두른 채 이화 아래 홀로 서서 꽃들 속의 꽃을 솎아내고 있다. 손을 탈탈 턴 엄마는 눈과 입을 한순간 활짝 열며 내 품에서 아이를 쏙 뽑아간다. 엄마가 오월처럼 웃자 아이도 웃고 나도 웃고 꽃도 웃는다. 사랑에 불타오르던 순간, 나만의 가정을 꾸리던 시간, 아이들이 우리에게로 왔던 계절, 문학에 취해 휘청거린 날들 속엔 언제나 엄마가 산다. 엄마가 있었기에 더 붉었다. 내 오월의 선율도 참 깊고 화사했다.
계절이 익어 가을이 열렸다. 사르락 사르락 누런 잎들 떨어트리며 찬란했던 오월 떠올리는 장미도, 노란 이파리 뽀르르 날려 보내며 홍등 만발했던 계절 그리는 석류도, 어지러운 골목길 돌아 나올 때마다 싱그러운 풀냄새 불러내는 나도, 갈바람 스치자 국화 꽃망울 펑! 터지는 소리에 화들짝 깨어난다. 그렇게 가을에도 잠시 노란 신열을 앓는다.
여러해살이 식물은 자신을 피우고 떨어트리는 때를 안다. 아무리 화려한 것일지라도 버려야 다음 오월에 또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이라는 기약이 있기에 아쉬움 없이 놓아버린다. 일찍 핀 건 일찍 떠나보내고 늦게 피는 건 기다려 주는 순리에 순종하듯. 남은 계절, 푸른 몸에 살을 찌운 후 깊은 잠을 자고 나면 다시 꽃봉오리가 봉긋 솟아오를 것이다.
이제 생의 가을 길을 걷는다. 오월을 매단 꿈들이 가을바람에 하나둘 떨어진다. 환희 이별 상처 고뇌 슬픔… 내 삶의 순간들을 출렁거리게 했던 것들도 말라간다. 바스락 바스락 그것들을 밟으며 걷다 보면 석양 녘 언덕에서 또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오월을 추억할 테지.
젊음이라는 이름으로 더 붉었던 것들. 아직 장미꽃이 그립고 푸른 하늘에 양떼구름을 그리고 싶지만 저물 대로 저문 가을이 마지막 석양마저 떨어트리면 모든 것을 놓아야 할 것이다. 겨울 한기가 뼛속으로 파고들면 누렇게 들뜬 나의 마음은 말갛게 정돈될 테니.
오월 끝날, 햇살이 뜰 안에 가득 고였다가 그림자 속으로 숨는다. 오월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 장미 뜨락으로 나가 산책을 즐긴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더니 붉은 꽃잎 같은 노을이 내 마음속으로 뚝뚝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