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후를 맞아 오랜만에 낯선 사람들과 함께 국내 여행에 나섰다.
얼 에이 공항에서 만난 일행들과 목인사를 나누었다. 국내 여행이어선지 우리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많았다. 노년에 부부가 건강하게 여행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노인 중에는 불편해 보이는 다리로 혼자 오신 분도 있었다.
일행을 태운 비행기는 솜털 같은 흰 구름을 타고 창밖의 풍경이 보일 수 있을 정도로 낮게 날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눈에 덮인 로키산맥은 마치 한 폭의 산수화 병풍이 둘려 있는 것 같았다. 가끔 비가 뿌리기도 했지만, 미국에서 제일 크다는 덴버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인솔자를 따라 에스컬레터를 타고 내려와 터미널로 가는 트램에 올랐다. 트램이 정차할 때와 중간에도 많이 흔들렸다. 많은 승객 중에 연세 드신 여자 한 분이 손잡이를 잡지 않고 작은 가방을 의지하고 넘어질 듯 서 있는 모습이 염려스러웠다. “안전하게 손잡이를 잡으시는 게 좋겠네요.” 하자 주제넘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눈을 흘기고 내 옆에 그냥 서 있었다. 그리고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넘어져 머리가 트램 문에 부딪히기 바로 직전에 내가 그녀의 팔을 붙들어 무사히 목적지에 함께 내렸다.
오지랖은 한복의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을 말한다. 앞자락이 길다 보면 발에 밟혀 넘어지기 쉽기에 자신의 앞자락이나 잘 간수하라는 뜻이다. 현재 이 말의 뜻은 간섭할 필요도 없는 남의 일에 주제넘게 간섭하는 사람을 비꼬는 말이라고 한다.
내 오지랖은 하루 이틀 만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육 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동생들 숙제 챙기는 것부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는 동생들의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서 내 동생 잘하고 있냐고 묻기도 했다.
회색 구름이 하늘을 덮은 쌀쌀한 날씨다. 빨간 사암석으로 둘러싸인 Red rock Amphitheater에 들어서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공연이 시작되었고 예약이 안돼서 안에는 들어가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이곳은 1,500석이 늘 만석이 된다고 한다. 비틀즈를 비롯한 유명한 가수들이 많이 와서 공연했다. 끝도 없이 넓은 초원을 지나 와이어임의 주 도시인 사이엔 시의 호텔에 도착했다. 금방이라도 비나 함박눈이 쏟아질 것 같았다. 겨울옷으로 갈아입고 우산을 챙겨서 호텔에 가방만 내려놓고 나왔다. 음식점에서 저녁을 하고 나오니 우박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호텔까지 걸어서 10여 분 걸리는 시멘트 길, 돌서더릿 길은 미끄럽고 회색 구름으로 시야도 흐려지고 날씨가 추우니 서둘러 걷게 되었다. 일행 중에 한쪽 다리가 불편하게 걸으시는 80대 남자분이 함께 걷게 되었다. 내 남편과 잘 걸으시는 분이 우리 바로 앞서갔다. 앞서가는 분의 부인과 나는 다리가 불편하신 분과 나란히 걸었다. 비에 젖어 미끄러워진 돌서더릿 길을 걷는 다리가 불편하신 남자분이 넘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나는 즉흥적으로 그분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분의 팔을 꽉 붙잡아 드렸다. 호텔에 거의 다 왔을 때 그분은 슬그머니 내 팔을 풀며 “우리 집사람이 보면 야단나요.” 하신다. 내 오른편에 걸으시던 분이 웃음을 참느라 넘어질 뻔했다. ‘아, 내 오지랖!’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다음날에 가끔 내리는 비를 맞으며 소들이 풀을 뜯는 끝도 없이 넓은 초원을 지나 사우스 다코타 주에 있는 러시모어의 큰 바위 얼굴에 왔다. 해가 쨍하고 나와서 4명의 대통령 얼굴 조각이 하얗게 잘 보였다. 1대 조지 워싱턴, 3대 토머스 제퍼슨, 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선택하고 조각한 Gutzon Borglum 에 관해서 설명을 들었다. 계단을 올라오다 소나무 그늘이 있는 의자에 앉아서 점심으로 바나나와 사과, 땅콩 쿠키를 먹고 있었다.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수십 개의 계단을 엄마보다 먼저 올라와서 내 앞에 섰다. “목이 마르니? 배고프니?” 하고 묻자 손가락을 입에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이에게 나에게 있는 쿠키와 물을 건넸다. 그 순간 뒤 따라 올라오던 아이의 엄마는 “멈춰. 쿠키를 먹지 마!”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 해하는 내게 “아이에게 땅콩 알레르기가 있어요.”라고 하지 않는가?
수십 년을 간호사로 일하고 은퇴했지만 지금도 어디서든지 아픈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버스 안에서 든 비행기 안에 서든 길을 걷다가도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을 보면 반사적으로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반응을 한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내 오지랖은 심각하니 자제하라고 남편은 충고한다.
3박4일의 러시모어, 크레이지 호스, 로키산맥 정점(Alpine)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이번 짧은 여행을 통해서 내 오지랖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상대에게 불편한 마음이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오지랖은 삼가야겠다. 하지만 요즘처럼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지내는 것보다는 우리처럼 이웃끼리 예의를 지키며 서로서로 돌보아 주는 오지랖이 아니고 배려하며 살고 싶다.
오지랖,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때때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지만 그것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촉매제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