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다시 오겠나/김영화
2023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집에 왔다. 한해를 마무리하며 난 문득 지나는 이 해에 무엇을 떠나보내었고 그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잠결에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일어났다. 예배 중에 무음으로 해놓았던 셀폰을 열어보니 한국에서 동생들로부터 여러 번 전화가 와 있었다. “언니, 어머니가 위급하셔, 전화 좀 받아.” 그리고 다음 메시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였다. 한국시간은 1월1일 밤이다. 1월3일 입관 식까지 올수 있겠냐고 한다. 팔이 아픈 나를 위해 아들은 한국행 항공권을 알아보고 남편은 짐을 싸고, 며느리는 한국의 추운 겨울옷을 준비해서 바로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몇 주 전에 어머니가 편찮으시다고 해서 내 아픈 팔이 좀 나으면 가 뵈려고 3월 초로 항공권을 사 놓았었다. 어머니는 3월까지 맏딸인 나를 기다릴 수 없었나 보다. 서둘러 비행기를 타고서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하러 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서울로 가는 13시간 동안 기내에서 음식을 사양하고 가능한 잠을 자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께 불효한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잠이 오지 않는다. 어머니의 일생을 그려보니 하염없이 눈물만 나온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오셨을 때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근 90 평생 어머니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어?” 물었다. 어머니는 천장만 한참을 쳐다보더니 “첫 아들을 낳았을 때 였어, 그 다음은 막내딸을 시집 보냈을 때 였지 싶다.” 그 때를 생각하며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셨다. 시할머니, 시부모 모시고 3대 독자의 며느리로 시집와서 딸 둘을 낳고 얼마나 설움을 많이 받았을까? 오래전에 할머니로부터 대충 들은 적이 있지만 내가 짐작했던 것 보다 상처가 크셨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옆구리가 아프다고 하는데, 혼기가 한참 지난 막내딸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단다. 막내딸을 시집보내고 나니 날아 갈 것 같았다고 한다. 그 다음 해 아버지는 취장암으로 돌아가셨다. 행복한 추억은 큰 고통 후에 온 기쁨인 것 같다. 언제가 가장 힘이 들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머니를 더 울리고 싶지 않아서 참았다. 내가 어머니 손톱, 발톱을 깎아드릴 때 마다 큰아들과 함께 살 때 아들이 손톱, 발톱을 시원하게 바짝 잘도 깎아 주었다고 하셨다. 둘째 며느리와 손녀들이랑 갔던 뉴질랜드, 호주 여행이 가장 추억에 남는 여행 이였다고 하셨다. 유별나게 아들을 선호하셔서 딸들 마음을 아프게 했던 우리 어머니다. 30여 년 전에 어머니가 허리 수술할 때는 셋째 딸이 어린 아들을 형제 집에 맡기고 4주 동안 병원에서 정성껏 간호했다. 다른 두 딸은 어머니에게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다 사드렸다고 10여 년 전에 오셨을 때는 자랑하시더니......
6남매 자식과 12손주의 애 끓는 통곡과 회한의 눈물을 뒤로 하고 어머니는 결 고운 삼베옷 만 걸치고 우리가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 진눈개비가 날린다. 간밤에 눈이 내려 솔가지마다 갈대마다 하얀 눈꽃이 피었다.
딸 집에서 가까운 아름답게 꾸며진 공원묘지에 모셨다. 삼우제를 마치고 자매들과 올케는 동해안을 거쳐 설악산에 갔다. 어머니와 함께 했던 곳을 다니며 울고 웃으며 어머니를 추억했다. 찬바람이 매워서 눈물이 나고 어머니의 따뜻했던 품이 그리워서 가슴이 메였다. 눈이 얼어붙은 얼음길이 미끄러워 엉금엉금 걸어 어머니가 몇 해 전에 와서 타셨다는 설악산 케이블카를 타러 왔는데 바람이 불어서 케이블카를 운행하지 않는단다.
몇 해 전 단풍이 가장 아름다웠던 가을에 어머니를 모시고 여동생 부부가 케이블카를 타러 왔었단다. 단풍 구경나온 인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예약된 사람들이 많아서 5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다음에 다시 오자고 어머니를 설득했단다. 그런데 어머니는 “언제 내가 다시 오겠는가? 하시며 여느 때와는 다르게 완강하셨다. 동생 부부는 인파를 뚫고 산길을 내려가 점심과 돗자리를 사왔다. 허리 아프신 어머니는 나무 밑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긴 시간을 기다려서 끝내 케이블카를 타고 오셨다며 “바로 이 자리 , 이 나무 밑이었어. 어머니가 선경지명이 있으셨나봐.” 말한다.
딸들이 모여서 어머니의 유물들을 정리했다. 유품 중에서 어머니가 50대 때에 우리와 함께 요세미티 캠핑 장에서 장작불 앞에 서서 손을 쪼이며 찍은 사진이 나왔다. 그 때의 어머니는 지금 나보다 20살이나 젊었다. 동생들은 내 사진으로 착각했단다. 원피스 차림의 날씬한 몸매, 환하게 웃으시는 건강한 모습이 아름다웠다.
40년이란 세월은 후딱 지났다. ‘인생이란 문틈으로 백마가 달리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이 삽시간에 지나간다.’ 라고 누군가 말했다. 어머니의 90 넘은 한 평생도 마치 하루해가 동쪽 하늘에서 강열하게 치켜 올라서 하루를 살고 서서히 서쪽 하늘 황금빛을 넘어가듯이 온갖 시름을 뒤로 하고 떠나셨다.
이 해에 나는 세상에서 나를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사랑해 주신 어머니를 떠나보내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부모 자식 간 천륜의 인연을 가는 세월 따라 보내야 했다. 설악산 케이블카는 계속 운행되겠고 요세미티 캠핑장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 갈 것이다. “언제 내가 다시 오겠는가?” 어머니는 다시 올 수 없겠지만 ...
아직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만나거나 전화라도 할 수 있는 오늘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하루하루가 소중한 시간들이다. ‘어제는 역사고 내일은 미스터리이고 오늘은 선물이다.’ 란 말이 있다. 선물로 받은 짧은 인생길,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금을 소중히 여기며 누리며 살아야겠다.
어머니에 대한 애뜻한 정이 보이네요. 언제 다시 오겠나 하시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 케이불카를 잘 타셨네요. 비록 힘들게 기다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