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야만 한다’와 ‘그럴 수 있다’

 

 

                                                                                                                                                          이성숙

 

   ‘그래야만 한다’에 인생을 저당잡힐 필요는 없다.

 그러지 않아도 우리는 법치 아래에 있고 대개 선량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야만 한다’ 보다는 ‘그럴 수 있다’에 의존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삶에 원칙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럴 수도 있다’를 폭넓게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 사람들은 일관성을 얻는 대신 과거에 자신이 내 뱉은 말 속에도  갇혀 드는 것을 종종 본다. 그것이 책임감일 때는 더 없이 좋은 일이고 또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지만, 유연성의 결여로 이어진다면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아는 P는 감정변화가 느리고 신중하다. 그는 외부로부터 받은 충격이나 감동을 오래 가지고 간다. 그는 지인들의 행사일이나 생일 축일 등을 꼼꼼히 메모해 둘 뿐 아니라 생활비를 쪼개 가면서 알뜰히 선물도 마련한다. 나 같은 사람은 P의 이런 철저함을 절반도 흉내 낼 수가 없다. 나는 쉽게 잊어버리며 P만큼 섬세하지 못하다. 그러나 내가 늘 비난받기를 즐긴다거나 핑계를 일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선택적으로 꼼꼼함을 발휘하는 편이며 그것도 사정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안타깝지만 ‘그럴 수도 있다’하고 잠시 접어 두는 것이다. 

  P는 늘 보상심리를 안고 산다. 그는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결정하며 상대방도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한 예를 보자. 그는 오래 전에 받은 선물의 목록을 보관하고 있다. 가격까지 추정하여 기록해 두었다. 그것은 이 후에 P가 선물하는 데에 결정적 기준이 됨은 물론이다. 받은 만큼 주는 것, 이것이 그래야만 하는  P의 심각한 단점이라고 하면 패설일까?

  각설하고, ‘그럴 수도 있다’의 사람이라면 그들은 생활에 불편을 겪으면서 까지 선물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관심이 아니며 단지 그럴 수밖에 없을 뿐이다. 그들은 형편이 나아지면 더 좋은-받았던 것과 상관없이- 선물을 할 수도 있다.  선물하는 기준이 상대에게 있지 않고 내게 있기 때문이다. 자칫 자기 합리화로 보일 수 있겠으나, 그런 태도는 상대방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므로, 상대가 나를 소홀히 대할 때도 마음 상해하지 않는다. 그에게도 그럴 만한 형편이 있었겠지 하고 지나가는 것이다.

  세월은 흐르고 상황도 변하며 생각도 자라기 마련이다. 유기체에게 일관성을 강요하는 것은 발전을 포기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예전에 그랬으므로 지금도 그래야만 한다면 발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옹졸한 결과를 초래하겠는가!

‘그래야만 한다’와 ‘그럴 수 있다’는 천평칭의 양끝이 아니다. ‘그래야만 한다’가 원칙이라면 ‘그럴 수 있다’는 유연함이요, 열려있음이다. 전자와 후자가 조화를 이룰 때 우리의 삶도 탄력적으로 운용되리라 믿는다. 그런 사람이라야 인생을 진정으로 향유한다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