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밭에서

 

 

커피밭에 갔었다. 하와이섬(빅 아일랜드라고도 부른다)의 코나에서 힐로를 가로지르는 11번 도로변에는 커피 농장이 도처에 있다. 관광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너무 큰 농장을 피해 작은 커피밭을 찾아들어 갔다. 입구에서부터 커피의 단내가 사람을 맞았다. 작아 보이기는 해도 태평양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반짝이는 바다물결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

농장 주인이 이것저것 설명을 해 가며 쪽잔에 커피를 건넸다. 뜨거운 태양과 감미로운 바다바람과 완성을 갈망하는 커피향의 조합은 이브의 유혹처럼 달콤했다.

 

잘 볶아진 커피는 결핍된 단맛과 결핍의 신맛과  풍만한  쓴맛으로 완성된다. 인생과 비슷하다. 붉은 색 커피 체리는 달큼 새큼 고운 맛을 냈다.

체리의 과피를 살살 어루어 먹고 나면 흰 씨앗이 나오는데, 이것을 말려 볶은 것이 커피콩인 모양이다. 커피에는 중독성이 있다. 카페인이라고 하는. 

그 체리 역시 사람을 중독시킨다. 열매가 너무 작은데 매혹적인 단맛을 내니 손이 아무리 바삐 움직여도 입안 가득 단맛을 채우지 못한다.  이런 감질나는 결핍이 중독을 부르는가 보다.

‘중독'은 주로 부정적인 말들과 연합하여 쓰이는 까닭에 퇴치해야 할 질병처럼 여겨지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독되지 않고서는 이루어 낼 것이 없지 않은가. 몰입의 극치가 중독이다. 위대한 발명들은 호기심에 중독된 과학자들에 의해 태어난다. 위대한 마라토너는 그 몰아의 경지에 중독되어 있다. 위대한 사상가는 신념에 중독된 사람들이다. 범부의 생애라 해도 삶의 희로애락에 중독되었기에 가능한 게 아니던가.

중독은 결핍을 촉매로 한다. ‘2프로 부족할 때’라는 광고 카피가 히트를 친 후, 2프로는  결핍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지만, 사실, 2프로의 결핍쯤은 안아도 좋겠다.  우리는 결핍을 메우기 위해 애써 수고하며 살아간다. 인생이 중독을 향하도록 돕는 것이다. 결핍을 결핍으로 이해하는 한 인생은 만성 우울증에 시달릴 뿐이다. 결핍은 삶의 동력이다. 

 

인생의 영역에서 완전체란 순전함이 아니다. 결핍을 안았을 때라야 순도 높은 완전으로 수렴해 간다. 중독과 결핍의 상생, 그것이 하마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