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주유하는데 초췌한 모습의 백인 남자가 다가와 자기가 게스를 넣어 줄 테니, 대신 잔돈을 좀 줄 수가 있겠느냐고 한다. 그러자고 하며 나는 운전석으로 돌아와 실로 오랜만에 ‘풀 서비스’를 즐기려 하였지만, 오히려 신경이 쓰였다. 그가 게스를 다 넣고 내 곁 유리창 쪽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그에게 5달러를 내밀었다. 잠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고맙다는 듯이 “God bless you." 하며 그 돈을 받고 곧 뒤돌아섰다.
내가 좋아하는 필레-오-피시(생선 샌드위치)와 시네몬 애플파이는 사지 않기로 했다. 바로 직장으로 출근하였다. 마침 밸런타인 데이 전날이라 직장은 축제 분위기였다. 하트 모양의 붉은 풍선들과 캔디 바구니, 정열적인 컵케이크, 각종 캔디를 동료로부터 가슴 가득 선물 받았다. 이러한 행동들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무한한 감동을 준다. 그야말로 달콤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의 인사이다. 이런 사람들 속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운인지 새삼 깨닫는다.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점심을 먹는 대신 회사 주위를 걸었다. 분수대에서 연보랏빛 물줄기가 환상적으로 뿜어내고 있고 연못의 물결이 바람에 따라 출렁이며 도시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려는 듯하였다. 기실 나는 아까 그 초췌한 모습의 남자를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내가 준 돈으로 혹 마약이라도 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느덧 나는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중년의 나이도 훨씬 넘긴 듯한 그 나이에 자존심을 내놓고 구걸로 연명하는 인생이 너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도 한때 꿈 많은 소년이었을 것이다. 어느 어미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으리라. 어쩌면 지지리도 불우했던 가정에서 태어나 갖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자라며 가난과 불행에 이골이 난 사람인지도 모른다. 혹은 평범하고 멀쩡하던 사람이 순간적인 일탈로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추락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는 그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도인이 되려 했을지도 모른다. 모를 일이다.
어쨌든 나는 점심을 거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를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걸인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것이 자의이건 타의이건 간에 추락한 천사들이다. 자기와 동등한 인간에게 비굴함과 억울함을 무릅쓰고 구걸해야 하는, 그 무언가에 짓눌린 사람들이다. 그들이 느끼는 수치와 수모감이 치유되길 빌며. 자신들이 날개 달린 천사였음을 자각하는 날이 오기를. 그래서 그들이 날개를 펴고 넓은 하늘을 마음껏 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기도를 했다.
그 백인 남자는 아마 모르리라, 내가 자기를 위하여 이렇게 단식하며(비록 한 끼지만)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나의 기도는 온당한가? 의문이 들었다. 나의 기도는 그를 의심한 데서 시작된 것이다. 물론 미심쩍게 행동한 그의 탓이 크다. 그러나 둘 다 마찬가지다. 의심하는 나나, 의심받을 만한 그나, 모두 가벼운 존재들인 것은 틀림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얼마 전 밀란 쿤테는 영면하였다)이란 소설 제목이 떠오른다. 나의 선행이 반드시 선한 결과로 귀결되길 바라는 욕심에서 시작된 기도다. 그러나 인간사는 반드시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좋은 의도로 시작했다. 그런데 나쁜 결과가 나왔다. 반대로 의도는 불순했다. 결과는 선하게 나왔다. 이런 역설적인 현상을 메피스토 법칙(Mephisto law)이라 하지 않던가.
우리의 속담엔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라는 말이 있다. 전자는 은유적이고 후자는 직접적인 표현이다. 비슷한 뜻을 지닌 고사성어로는 '배은망덕'을 들 수 있다. 사람에게 정을 주거나, 도움을 주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의 부조리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동일성과 항상심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일어나는 사단이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하여튼, 내 기도가 불순한 측면이 있었다 할지라도, 진심이 의심받을 만한 일면이 있었다 할지라도, 일말의 순정함은 진정코 있었음을......
내가 자신의 재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으며 그가 이제껏 받아왔을 상처에 함께 가슴 쓰려하고 있다는 것을,
출렁대는 분수의 물결을 바라보며 이제껏 나를 위하여 기도해주었을 많은 사람도 헤아려본다. 나는 정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사랑과 정성을 받으며 여기까지 온 것인지, 내 생전 도저히 다 갚을 수 없을 듯하다.
집을 향한다. 작은 곰 인형의 붉은 심장이 “I love you."라고 간절히 말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셨네요. 혹자는 노숙인을 도와주면 습관이 생겨서 더 안좋게 한다고 하지요. 하지만 일단 이 순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 주는 것이 더 적절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