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슬픔

                                                                                                         배 헬레나

                                           

 내 마음 어느 곳에 숨어 있다가 가끔 떠오르곤 하는 사람이 있다. 웨이브가 살짝 진 긴 머리, 흑진주같이 반짝이던 검은 두 눈동자, 오뚝한 코에 크고 붉은 입술의 소유자이지만 몸집은  가냘프고 작은 편이어서 마치 걸어 다니는 예쁜 인형을 보는 듯 착각이 들게 하던 ㄱ ㄱ ㅇ 선생님.

 

 그녀는 나의 여중 시절 ‘가정’ 선생님이셨다. K사대 출신인 그녀는 명석하고 실력 있는 정통파 선생님이셨다. 점잖고 귀족적인 이미지로, 또래의 다른 여선생님들처럼 화려하게 멋을 부리지도 않았고 수다스럽지도 않았으며 우리들과 친해 보려고 일부러 애쓰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조용히 자기 직무에 충실한 모범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지금 회상해 볼 때 그녀는 때때로 자기만의 어떠한 고고한 세계에 몰두해 있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였다. 

 

 그때 내가 재학 중이던 S 도시의 여중은 그녀가 첫 교사 발령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그녀는 나의 담임선생님이 아니어서 일주일에 한두 번의 가정 시간과 가끔 교정에서 마주치는 것 외에는 나와 가까워질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래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수업 시간 중 그녀가 나에게 질문을 한 번 했던 일이다. 그날은 소불고기의 양념에 대한 문제 풀이가 있었는데 선생님은 먼저 다른 아이들에게 물어보아도 아무도 제대로 대답을 못 하자 마침내 나를 지명하셨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나 또한 그 대답을 바로 맞추지 못하여 선생님이 얼마나 실망하셨을까 하여 지금도 못내 아쉽다.

 

 과묵하던 그녀가 자기의 진면목을 우리에게 우연히 보여준 적이 있다. 수업 중 어쩌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여고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이미 많은 책을 섭렵한 독서광이었고 특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밤을 새우며 읽었다고 고백하였다. 바로 그때 내가 그녀의 숨겨진 정열을 감지했다고나 할까? 나와 비슷한 사람이 여기에 또 있구나- 하는 생각, 그때부터 나는 그녀가 왠지 가깝게 느껴졌다. 그 시절 나 또한 괴테와 앙드레 지드, 특히 헤르만 헤세의 문학에 심취한 꿈 많은 문학소녀였으므로.

 

 그 후 나는 여중을 졸업하고 S 도시를 떠나와 대구에 있던 여고로 진학하게 되었다. 어느 여름 방학에 고향에 들러  나와 한 반이던 친구와 함께 전 담임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뜻밖에도 그녀의 죽음을 전해 듣게 된 것이다.

 

 그녀는 타도시 출신이라 S 도시에서 혼자 방 한 칸을 빌어 자취하며 살았다. 그래서 가끔 기차를 타고 두 도시를 왕래하던 중 우연히 한 남성을 알게 되었다. 그는 S 도시에서 스테레오 가게를 운영하던 젊은 유부남이었다. 그녀가 그 남성과 얼마나 깊은 관계였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기차 여행을 하며 만나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의 불륜에 대한 소문이 마침내 학교까지 번져 별안간 그녀는 어느 외진 시골 학교로 전근을 하도록 강요받게 되었다. 추측건대 거기에서도 동료 선생들과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들의 야유와 비난의 눈길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끝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을 지경까지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롯데를 연모하는 베르테르처럼 그 남자에 대한 사랑이 너무 깊고 순수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나는 그녀의 죽음을 처음 전해 듣고 한동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겨우 스물대여섯 정도의 그녀가 너무나 가여웠다. 그녀의 왕방울처럼 큰 두 눈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로 낯선 곳에서 혼자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 그녀가 밤새워 읽었던 그 숱한 책들의 감흥과 희열,  꿈꾸던 모든 희망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만약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래서 나에게 다시 같은 문제를 물어볼 수 있다면 이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인제 그녀보다 훨씬 더 많은 인생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그녀는 언제나 앳된 처녀 선생님으로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오늘처럼 이렇게 보슬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을 저녁이면 그녀의 창백한 모습이 내 마음의 영상에 또다시 애잔하게 떠오른다.

 

 

 

나의 가정 선생님,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