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다섯 살

 

이리나

 

 

큰 맘 먹고 앨범 정리에 나섰다. 연도 별로 아이들 사진 정리를 마치고 내친김에 내 사진까지 정리하기로 했다. 몇 년간 손도 대지 않은 앨범을 들추었다. 백일 사진, 돌 사진 옆에 어려서 찍은 사진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어느 사진 하나에 시선이 머물렀다. 몇 살 때였을까. 아마 한 다섯 살 때 쯤 아닌가 싶다. 개나리 꽃 보다 더 진한 노란색 털 스웨터를 입고 가지런히 머리를 두 갈래로 묶은 내가 배시시 웃고 있다. 그 옆에는 당시 유행하던 군청색 우주복을 입은 동생이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우쭐대며 있고, 지금의 내 얼굴과 닮은 엄마가 환하게 웃고 있다.

 

몇 장을 넘기니 유치원 다닐 때 찍은 사진들이 보였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나는 작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엘 다녔다. 그 인근에선 하나 밖에 없는 유치원이었다. 그 교회 성도들 자녀가 대부분이고, 정작 그 동리에서 다니는 유치원생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근처 야산으로 소풍을 갔는지 잔디밭을 배경으로 스무 명의 원생들이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흑백 사진들이 있다. 앞니가 다 빠진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는 나도 보인다.

 

새 옷을 입고, 새 신발을 신고, 머리를 얌전히 땋고, 엄마 손을 잡고 유치원엘 다녔다. 아침을 먹고 반나절이 지나면 집으로 왔다. 간식 먹는 재미가 쏠쏠 했는지 매일 빠지지 않고 다녔단다. 유치원 선생님은 눈이 커다란 30대 초반의 여자분 이셨다. 상냥하고 예쁘게 생긴 선생님을 참 좋아 했다. 성함도, 어느 마을에 사셨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친구들과 함께 가나다라를 배우고 색칠 공부를 했다. 강단에서 뛰놀고 강대상과 교회의 긴 의자에서 술래잡기 놀이를 하다가 들켜서 혼난 기억이 떠오른다.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동요와 찬송도 배웠다. 아직도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탄일종이 땡땡땡. 멀리 멀리 퍼진다. 저 깊고 깊은 산속, 오막살이에도 탄일종이 울린다.’ 그땐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불렀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소박하지만 뜻 깊은 크리스마스 노래다. 교회의 성탄절은 그 마을 큰 행사 중의 하나였다. 초파일에는 절에서 주는 나물밥을 먹고, 크리스마스 땐 교회에서 특별 행사를 보고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해 겨울엔 유난히 눈이 많이 왔다. 오는 눈을 뒤로 하고 우린 강단 위에서 이 노래를 율동과 함께 불렀다. 그리고 유치원을 졸업했다. 나의 교회 생활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 후로 강산이 두 번 바뀌고 또 몇 년이 흘렀다. 내 삶에 폭풍우와 세찬 비바람이 일자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L. A. 한인 타운 인근에 위치한 작은 개척 교회였다. 설교 시간에 목사님께서 성경 책 페이지 수를 말해주시면 참 좋았다. 사람들은 친절했지만 교회 생활은 너무 생소했다. 낯선 단어들. 낯선 문화. 낯선 생활들. 두어 주 다니자 내가 있어야할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다니려하자 친구가 점심이나 먹고 가라고 했다. 당시 타주에서 이사 와 혼자 살고 있던 나에게 공짜 점심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예배 후 몇 번 교회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것도 잠시 뿐, 공짜 점심의 효과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일요일 아침, 아직도 나의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침대를 뒤로하고 일어나야하는 부담감은 점점 커져갔다. 하지만 교회 생활도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았다. 나에게 내리던 세찬 폭풍우도 잠잠해 지는 것 같았고 말갛게 씻은 고운 해가 보이는 여유도 생겼다. 교회가 부흥을 하자 많은 부서에서 봉사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부담감도 떨쳐 버릴 겸, 점심 값도 갚을 겸, 난 봉사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곳이 유년 부. 미리 와서 먼저 예배를 드린 후, 부모가 예배를 보는 동안 대여섯살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봄에 돋아나는 풀같아 더불어 있으면 연두색 푸른빛이 전해지는 듯 했다. 일은 힘들지 않았다. 시간 맞춰 스낵을 주고 칼라링을 도와주면 됐다. 전도사님이 오셔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가르칠 때면 쉬기도 했다.

 

몇 주가 지났다. 빼지 않는 한 주기적으로 찾아와 괴롭히는 치통처럼, 일요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또 다시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만 둬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선생님’이라 부르며, 당연히 다음 주에 다시 볼 것을 기대하는 아이들에게 실망을 주고 싶진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난 이곳에서 놀라우리만치 적응을 잘 했다. 익숙하게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과 접촉할 기회도 별로 없었는데, 전혀 낯설지 않았다. 아이들과도 잘 통했다. 내 자신도 꽤 의아해했다.  100도를 넘나드는 화창한 L.A.의 어느 여름, 시원한 에이콘 밑에서 스낵을 먹는 아이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나를 인도하시는 이가 처음 집으로 초대한 때. 내 나이 다섯 살.

 

 

이 글은 시인 이정옥의 시, “초대”에 대한 답 글입니다. 

 

8/21/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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