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작은 꽃이 되고 싶다
이리나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다. 여름은 가고 메마른 가을이 느껴진다. 무심코 손을 비빈다. 낯익은 엄마의 손이 보인다. 세월의 흔적이 지나간 자리가 역력한 손이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 갑자기 사람들의 시선이 손에 꽂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다가 큰 맘 먹고 가넷이라는 작은 보석이 박힌 반지를 샀다. 마다가스카에서 생산된 가넷은 자줏빛이 영롱한 보석이다. 반지를 끼자 손이 빛난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손에서 반지로 이동할 것이다.
자주색이라고 생각했는데 햇빛 아래서 이내 핏빛으로 변한다. 금방 흘린 피가 냉각된 색깔처럼 보인다. 설마하고 다시 햇빛에 비쳐 본다. 역시 뚜렷한 선홍색이 빛을 발한다. 작은 체온에도 녹아버릴 것 같은 종이보다 얇은 눈의 결정체처럼 이 색깔도 매우 연약해 보인다. 이 보석을 보자 날 위해 죽은 한 사람이 떠오른다. 나이 서른셋. 이 꽃다운 나이에 죽은 젊은이가 있다. 나는 그를 결코 잊지 못한다.
임을 잊지 못하는 건 송강 정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천부적 문인이었던 송강은 <사미인곡>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하루도 열두 때, 한달은 서른 날/ 잠깐 생각 마라/ 이 시름 잊고자 하니 마음에 맺혀있고 골수에 사무쳤으니/ 뛰어난 의원이 와도 이병을 어찌할꼬/ 아아 내 병은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져 범나비가 되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쪽쪽 앉았다가/ 향기 묻은 나래로 임의 옷에 옮으리/ 임이야 날인 줄 모르셔도 내 임을 쫓으리.
송강은 나비가 되고 싶어 했나 보다. 나비가 되어 이곳저곳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 임이 못 알아봐도 하염없이 쫓아가려고 했다. 나비는 고운 곡선을 그리면서 세상을 자유롭게 난다. 가다가 쉬고 또 날다가 머무는 한이 있더라도 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차라리 꽃이 되고 싶다. 나의 이름이 불린 날, 그의 품에 안긴 작은 꽃이 되련다. 이런 안타까운 노래를 부른 송강처럼 그가 그냥 지나쳐도 못내 행복해하면서 오히려 그 자리에서 향을 내련다. 움직이지 못하지만, 항상 영롱한 가넷 빛을 발하고 싶다. 가시에 찔리고 온몸이 찢긴 아픔에 알아보지 못해도 좋다. 주먹을 불끈 쥐고 얼굴이 뻘게지도록 아우성치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괜찮다.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행여 들킬세라 살며시 지켜보는 이들과도 함께 하고 싶다. 소원하기는 땅속에 깊이 뿌리를 박은 그 나무 곁에 있으면 한다. 선홍색 피가 뚝뚝 흐르는 곳에, 창조주의 성스러운 피가 흘리는 그 장소에, 숨 쉬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믿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고 아름다운 그 곳에서 그와 함께 호흡하고 싶다. 어쩌다 그의 핏방울 하나 튄다면 그 자리에 활활 타버려도 좋겠다.
그가 부르는 날 이 세상 훌훌 털고 가련다. 그 곁에서 작은 꽃이 되고 싶다. 발에 밟혀도 모를 작은 꽃 한 포기 보며 날 생각해주면 좋겠다. 다정한 눈길 내게 머물 땐 터질듯한 기쁨에 겨울 것이다. 온 힘을 다해 몸을 떨어 조그만 꽃잎 한번 끄떡이는 것으로 화답하련다. 그의 곁에서 난 영원히 꽃으로 피어나고 싶다.
1/19/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