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살, 그 드라마

                                                                                                                               한영

  살다 보면 잊고 있던 일들이 하나의 스틸 컷처럼 떠오를 때가 있다.

집 바깥에 가벼운 인기척이 있고 난 뒤, 집안으로 우편물이 떨어지고, 연이어 입구가 닫히는 딸그락 금속성 소리가 들린

 다.  우편함이 집 안으로 연결되어 있었을 때다. 어느 가을날 드디어 기다리던 편지가 그곳을 통해서 떨어졌다. 미국 간호사  면허증이었다.

나의 25살은 그렇게 시작됐다.

  직장을 얻으려고 다녔다. 미국에서 일한 경험이 없어서 취직이 어려웠다. 여러 곳에 이력서를 써냈다. 드디어 한 곳에서 연락이 왔는데 다행히 남편이 일하던 직장 근처였다. 규모는 큰 병원이었으나 인종적으로는 아프리카 아메리칸이 대다수였고, 아시안이 소수로 일하고 있었다. 이민 오기 전, 한국에 있을 때 수술실에서 일 년 일한 경험이 있었다. 영어에 서툴러서 병실보다는 수술실이 일하기가 좀 쉬운 줄 알고 신청했는데 그대로 배정되었다. 취직이라는 것을 하기는 했으나 하루하루가 고전의 연속이었다. 수술을 진행 중인 대부분의 의사는 긴장하고 신경이 날카롭다. 가끔 병동에서 오는 급한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데 의사들은 수술에 집중하느라 고개도 들지 않고 말한다. 마스크를 통해 나오는 말을 알아듣고, 전해야 하는데 영어로는 내 귀와 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눈치’를 열심히 활용하였다.

   이즈음에 친구 두 명이 미국으로 이민 왔다. 시카고 가는 길에 엘에이 우리 집에서 하루 묵어가게 됐다. 한국에서 시카고로 직행하는 비행기가 없기도 했던 것 같다. 침실이 하나인 아파트에 살 때였다. 방을 내어주고 우리 부부는 거실에서 매트리스를 깔고 잤다. 빛바랜 커튼,작고 낡은 식탁, 가끔씩 큰 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오래된 냉장고, 그런 것들이 별로 불편하거나 창피한 줄 몰랐다. 친구들은 우리 살림살이를 보고 실망하고, 또한 자신이 곧 시작할 미국 생활에 걱정이 많은 것 같았다. 공연히 미안했다.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기를 갖게 됐다. 첫 임신의 어려움과 미국 직장 생활의 고충을 어떻게 병행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생각나는 건, 카페테리아 햄버거이다. 큰 몸집의 아저씨가 두툼한 손으로 빵을 꾹 눌러서 주던 것을 매일 사 먹었다. 햄버거는 나의 기호 식품이 아닌데도 그때는 너무 맛있게 느껴졌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눈앞에서 별이 떠다닐 때라야 아이가 이 세상에 나온다고, 산월을 앞둔 내게 친정어머니가 자주 전화해서 말했다. 그 말이 귀에 맴돌아 난 집에서 오래 버텼다. 하늘이 노래지지는 않았으나 뿌옇게 보이는 새벽에 집을 나섰다. 그 덕에 병원에 도착한 지 세 시간 만에 나는 엄마가 되었다. 남편이 장미 꽃다발을 들고 병실로 들어섰다. 그 붉은 장미꽃이 아름답다는 생각보다 저 꽃값은 얼마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의 두 식구 일주일 식료품값과 맞먹는 가격이라고 짐작했다. 탐스러운 딸기 봉지의 가격을 보며 들었다 놨다 하며 망설이던 시절이었다.

   아이는 매일 조금씩 자라났으며 나의 생활도 그와 같이 변했다. 남편은 낮에 일하고 나는 오후 시간이나 밤에 일했다. 몸은 몹시 피곤했으나 새생명이 주는 힘이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고 변화하는 아이의 모습은 내가 엄마로써 마주하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아이는 어떻게 키워야 하는 지, 생소한 첫 경험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앞에 놓인 일들이 많고, 또한 너무  긴장하여서 그 귀한 시절을 좋은 줄 모르고 흘려보냈다.

그해, 새로운 것들이 빠르게 내게 다가오고, 또 지나갔다. 수많은 장면이 엮어내는 25살 드라마는 풋풋하고 다양한 스토리를 만든다. 배경은 늘 밝게 빛나서 그 시절의 고단함과 자존심에 생긴 생채기는 보이지 않는다.

  예전 사진과 지금의 사진을 같은 면에 실어서 만든 앨범을 선물 받았다. 크리스마스에 받은 것 중에 가장 좋아하는 선물이다. 결혼사진은 너무 어려 보여서 나인 줄 알면서도 생소하다. 내 사진이 어색할 정도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매일이 새로웠던 그날들은 가 버렸다. 그리고 다른 날들이 앞에 있다. 상자째로 사 놓은 딸기는 냉장고 안에서 상해가고 있다. 남편은 그동안 꽃다발 사는 방법을 잊은 듯하다. 어제의 복제 같은 오늘이 계속되는, 요즈음에 찍는 드라마는 밋밋하고  단조롭다. 배경마저도 석양이라서, 더욱 가라앉아서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래도, 이대로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