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것들의 소리

 

                                                                                                     한영

 

   새들의 언어를 이해했다고 하니 친구가 말없이 웃는다. 화초를 아름답게 가꿀 줄도 모르고 애완동물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내가 새들의 대화를 알아들었다고 하니 생뚱맞게 들렸을 것이다. 

 

   지난 주말 저녁 무렵이었다. 새 한 마리가 뒷마당에 내려앉았다.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이제 갓 나온 새싹 곁으로 다가간다. 연한 잎을 쪼아 먹으려고 하는 것을 손 내저어 쫓아 보냈다. 다시 올까 걱정되어 종이상자 하나 접어서 묘판을 덮어 놓았다. 친구가 여행을 떠나며 맡겨 놓고 간 유기농 채소의 묘판이다. 

 

   미련을 못 버렸는가? 쫓겨 갔던 그 새가 이튿날 다시 돌아왔다. 자그마한 몸체에 우윳빛 털, 날렵한 모습이 전날 왔던 새가 틀림없다. 슬금슬금 걸어서 묘판 앞으로 다가가던 용감한 새는 종이상자 지붕 아래 얌전히 있는 새순을 노려보면서 거리를 가늠해 보더니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담장 위로 날아오른다. 담장 위에는 자태가 비슷한, 조금 작은 새가 기다리고 있다가 반긴다. 둘은 마주 보고 소곤대는데 땅 위에 있던 새가 남자친구인 듯싶다. “맛있는 것 구해 주려고 했는데 어렵겠어, 미안해” 하고 말한다. 기다리던 새가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같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묘판의 종이 덮개를 들춰본다. 하루 사이에 해님이 그리도 그리웠는지 온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새싹들이 햇빛 아래서 크게 기지개를 켜며 추웠다고, 목마르다고 호소한다. 이게 나이 듦의 혜택인가. 들리지 않던 그들의 소리를 듣게 됐다. 그러고 보니 앞집의 고양이 소리도 듣는다. 자기 집을 버리고 늘 우리 집 앞에서 낮잠을 자다가 인기척이 나면 홱 뛰쳐나와 놀라게 하더니 요즈음은 꿈쩍도 않고 고개만 들어 나른한 표정으로 인사한다. ‘이제 돌아오슈? 수고했소.’ 그 언어가 나를 두드린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마음이 있다. 마음이 있으면 다른 것과도 마음이 만나 교감하고 싶어 한다. 그런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정적 가운데 느껴지는 움직임에 조용히 귀 기울여야 침묵의 언어, 마음의 소리를 비로소 들을 수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의 소리에는 무한한 사랑과 평화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미세한 소리를 듣게 되면 아침에 이슬이 맺히고, 석양이 아름다운 까닭을 알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날이 가며 계절의 소리도 듣는다. 연두색 이파리와 함께 다가오는 봄의 소리,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살아 움직이는 여름의 소리, 나뭇잎을 아름답게 물들이며 떠나가는 가을의 소리 그리고  끝없이 인내하며 기다리는 겨울의 깊은 숨소리를 듣는다.

마침내 자연과 함께하고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온다. 손톱보다도 작은 꽃이 왜 인적도 없는 언덕 위에서 조용히 피어나는지, 갈대가 왜 그렇게 흔들리며 살아가는지, 추운 겨울이 다가오는데 나무는 왜 잎을 다 떨구는지 깨닫게 된다. 자연과 마음을 통할 수 있다면 사는 이치를 깨우치고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이마 위에서 살랑거리는 봄볕이 유난히 부드러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