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

 2019년 2월 초순 캘리포니아 LA를 비롯하여 인근 지역에 뚝 떨어진 기온만큼이나 기록적인 겨울비가 무섭게 내렸다. 모처럼 이웃에 있는 샌가브리엘 산맥이 온통 눈으로 뒤덮였다. 남가주 한인들이 가장 자주 오르는 산은 샌가브리엘 산맥의 최고봉인 마운트 샌안토니오 일 것이다. 마운트 볼디(Mt. Baldy)로 더 잘 알려진 산이다. 해발고도가 1만64피트(3,070m)로 백두산(2,744m)보다 훨씬 높은 산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저 멀리 눈으로 가득 쌓인 산 정상이 눈부시게 다가온다. 마치 눈 덮인 일본 후지산이 연상된다. 저잣거리에서 까마득한 후지산 정상을 보았을 때, 순백색(純白色)이 주는 상서로운 기운이랄까 신비함이랄까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신령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인들은 후지산을 ‘신앙의 대상이자 예술의 원천’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받았다.

 LA는 일 년 내내 눈이 내리지 않는 도시다. 다만 겨울철에는 이따금 샌가브리엘 산맥 정상에 얼마간 눈이 덮여 있곤 할 뿐이다. 반면 올해는 예년에 비해 낮은 기온과 많은 눈이 내려 상당 기간 쌓여있다.

 일 때문에 급히 LA 다운타운에 갔다. 도심은 혼잡하고 지저분하고 노숙자들로 넘쳐난다. 노숙자들의 텐트가 길거리를 점령해 대낮인데도 여성 혼자서는 무서워 걸어갈 수 없을 지경이다. 천사의 도시가 악마의 도시, 유령의 도시 같다. 

 노숙자들을 보며 전분세락(轉糞世樂)이란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낫다’는 뜻으로,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힘들어도 죽는 것보다 좋다는 말이다. 저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성어인지 모르겠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노숙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저들 가운데 소수는 긍정의 마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은 잉여 인간처럼 살다 갈 것이지만 우리가 문명국가, 문명사회라면 저들을 방치해선 안 될 것이다. 노숙자들을 구제하지 못하는 국가, 사회라면 그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공동체가 파괴된 야만의 시대지 문명의 시대는 아니다 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부자들에게 유리한 신자유주의 체제는 어떻게든 보완되어야 한다. GDP(국내총생산)가 아무리 높은들 무엇 하나. “요람에서 무덤까지”란 복지 제도는 언감생심, 최소한 인간적 품위는 유지할 수 있는 국가 시스템이 필요하다. 더 이상 인간을 약육강식, 정글 법칙에 몰아넣는 시장만능주의는 안 되지 않는가.

 자본주의는 인간의 끝 모를 욕망(이기심)을 동력으로 삼는다. 어쩌면 저들은 그 욕망의 포화에 만신창이가 된 자들일지도 모른다.

 햇살은 따사로우나 바람은 차갑다. 안은 춥고 밖이 따뜻하다. 나의 내면 풍경 같다. 불현듯, 내 영혼도 노숙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욕망하는 인간이란 면에서 노숙자와 나는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내 욕망의 음습함과 더러움과 비겁함을 근사한 구두와 양복으로 포장해도 없어지진 않는다. 다만 감출 뿐이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나도 모르게 한숨을 길게 쉬며 하늘을 보았다. 문득, 멀리 보이는 순백의 산 정상은 뭔가 모를 부끄러움과 위안으로 다가온다. 왜 일까?

 새하얀 눈이 자극하는 순결함, 무구함, 순수함은 길바닥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가치다. 지금 눈 덮인 샌가브리엘 산맥 봉우리는 천상의 세계고 탈속의 경지라면, 걸인들이 북적대는 다운 타운 거리는 지상의 세계고 처참한 속세다. 높디높은 산꼭대기에 뒤덮여있는 희디흰 눈은 그동안 내가 현실에 압도당해 잊고 있던, 순결함과 무구함과 순수함 등 이상적 가치를 환기시켜 준다. 그리고 하나 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버리지 말자” 체 게바라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국가든 민족이든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잘 사는 세상은 꼭 오리라. 이 바램은 불가능한 꿈이지만 차마 버릴 수 없는 이상이기도 하다.

 포근한 함박눈을 맞은 지 오래다. 고향 집 뒤꼍 대나무 잎에 사각사각 내리던 눈 소리도 그립다. 눈을 밟아 본 지 아주 오래지만, 저 멀리 있는 마운트 볼디 산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삶이 비록 질퍽거리는 진창을 헤맬지라도, 그래서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져 있을지라도, 산 정상의 흰 눈은 내 안에 숨어 있는 순정함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내가 다시 잠시라도 아름다워질 수 있기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새삼스럽지만 모든 자연은 나를 키우고 나를 일깨워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경치가 의미화되니 멀기만 하던 샌가브리엘 산맥도 내 안에 들어와 깨달음을 준다. 저 멀리 있는 경치도 내면화시켜 의미가 생성되면 풍경이 되는 것 같다. 경치는 완전한 자연의 모습이고 풍경은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