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잠시 외출했다가 자동차 접촉사고를 냈다 혹은 당했다.

 뒤차가 내 차의 사이드 밀러를 치고 나갔다. 혹은 내가 주의하지 못하고 차선을 급히 바꿨다.

 아기를 태운 여자 운전자가 내려 와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목청 높여 언쟁하는 일에 언제나 자신이 없고,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면 되었으므로 잘잘못을 따질 겨를도 없이 사과부터 했다. 그러나 사실, 지금도 나로선 어느 쪽의 과실이었는지 명백하지 않다.

 인도 쪽의 거리 주차장에서 중앙선 쪽으로 진입해야 하는 나는 점등신호를 진작부터 보내고 있었고 뒷쪽 사거리에서는 정지신호가 막 풀린 참이라 뒤따라 오는 차들은 멀리 있었다. 내 생각엔  끼어들기가 용납이 안 된 뒤 차 운전자가 순간 과속을 했던 것이다.

내 차는 사이드 밀러가 날아갔고 그 차는 무사했다. 소리를 질러야 할 쪽은 내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건 싸움에 져서가 아니라 싸움을 걸어오는 그들의 태도 때문이다. 나만 옳다는 생각, 먼저 기세를 잡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소리부터 지르는 사람들 말이다. 일의 시발과 귀추는 말로써 능히 풀어갈 수 있다. 나는 특히 따지고 분석하는 일에 흥미가 없고 쉬이 지쳐 버린다. 따라서 상대방이 조목조목 자신이 옳다 하면 기꺼이 일 백보 양보할 의향이 있는데도, 겁을 주려는 것인지 연약한 젊은 여인이 대로에 차를 세우고 삿대질을 하며 악을 쓴다. 볼 성 사나운 일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나는 종종 과학책을 읽는다. 더러는 초등학생도 이해할 정도로 쉽게 쓰인 책들이다. 방대한 과학적 지식을 터득할 목적이 아니라, 그 속에서 발견되는 인문학적 즐거움을 누리려는 것이므로 어려운 이론서를 앞에 두고 머리를 싸맬 것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홀로그램 우주론을 공부하고 있다. 덕분에 짧은 지식이 또 하나 늘었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일부라는 것. 유레카! 내가 상처 입힌 사람이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면 그에게서 문득 내 모습을 볼까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서로의 진실에 마음 열다 보면 언쟁할 일은 거의 없고 마는 것을.

 

  이런 현학적 무기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정녕,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