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타운 전치과에서
LA 코리아타운 안에 있는 전치과에 갔다. 한쪽에 기다리는 사람들 보라고 신문과 여러 잡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거기에 월간지 「샘터」와 「좋은생각」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 살 때 기차역이나 시외버스 터미널 대합실 가판대에 두 잡지가 나란히 꽂혀있었던 것을 보았다. 오랜만이라 새삼스러웠다. 그러나 갑자기 눈앞에 있는 「좋은생각」이란 잡지 이름에서 대중을 상대하는 잡지명 치곤 「바른생활」처럼 유아적인 것 아닌가란 의아함과 함께, 한편으론 잡지 이름이 슬로건처럼 느껴져 전체주의 잔재 같기도 했다.
‘좋은 생각’이란 말속엔 이미 ‘나쁜 생각’이란 말이 내재 되어있다. 좋은 생각은 선한 것이고 옳은 것이며, 나쁜 생각은 악한 것이고 그릇된 것이라는, 선악 구도가 숨어 있다. 즉, 흑백논리가 도사리고 있다. 흑과 백 사이에 여러 가지 색깔이 존재하는데, 다양성이나 중립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닫힌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선악이란 실체화 될 수 없다. 절대불변의 진리로서 선이란 없다. 선과 악이란 근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동양의 일원론적 사상은, 선악은 모두 내 안에 존재함으로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야 함을 강조한다.
합리주의 입장은 절대 진리가 있다는 것이고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는 절대 진리가 없다는 것이다. 해체주의에서는 시(是)와 비(非)를 따지지 말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이쪽에서 옳은 것이 저쪽에서는 그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특징 중 하나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를 명확히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과 상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의 세계관은 판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보수적 관점에선 ‘좋은 생각’이 진보적 관점에선 ‘나쁜 생각’일 수 있고, 우파적 시각에선 ‘나쁜 생각’이 좌파적 시각에선 ‘좋은 생각’일 수 있다. 특정 종교가 있는 신자의 관점에서 ‘좋은 생각’이 종교가 없는 비신자의 관점에선 ‘나쁜 생각’일 수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보는 시각이 다르다. 그래서 ‘좋은 생각’이란 것도 철저하게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무엇이 ‘좋은 생각’이란 말인가.
우리가 당연히 나쁘다고만 인식하고 있는 야동(野動)과 밀수(密輸)를 보자. 뜻밖에도 포르노 비디오는 발기부전증 환자에겐 치료 도구로 사용된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 때 문익점은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몰래 들여와 이를 보급 시켰다. 비로소 백성들은 솜털로 지은 옷으로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한국에선 위인이라 그의 업적을 칭송하지만, 당시 원나라 처지에서 문익점은 명백한 불법 밀수꾼이었다. 오늘날 중국 기업이 한국 기업 기술을 빼간 것처럼. 그러나 밀수가 세계사적으론 문명을 전파하고 확산시켰다고 노르웨이 트론헤임대학교 교수 사이먼 하비(역사.미술사학자)는 이야기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사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는 것 아닌가? 이것은 상대적 진리는 성립될 수 있어도 절대적 진리는 성립될 수 없다는 주장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좋은 생각’이 지향하는 바는 윤리적이고 건전하고, 소박하고, 교양적인 것 같다. 그러나 사회의 불평등과 극심한 빈부격차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좋은 생각’이라면 진선미를 가장한 ‘나쁜 생각’이다. 권력이 부정하고 사회가 곪아 터졌다면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해도 별 볼 일 없지 않을까. 반대로 시대가 건전하고 사회가 건강하다면 굳이 ‘좋은 생각’을 유난스럽게 강조 안 해도 되지 않을까.
민주주의 요체는 다양성이다. 민주사회는 ‘좋은 생각’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생각’이 더 중요하다. 대중을 계도 하려는 듯한 냄새가 짙은 ‘좋은 생각’보다 ‘다양한 생각’이 존중되는 사회는 역동적이고 창의적일 수 있다. 좋은 생각만 하는 사회는 도덕적 일진 몰라도 사고의 발랄함이 사라질 것 같다.
왜 우리는 다 같이 ‘좋은 생각’만 해야 하나? ‘삐딱한 생각’을 하면 안 되나?
‘좋은 생각’이 품은 함의는 규범적인 것, 모범적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체제 순응주의, 현실 순응주의다. 그에 비해 ‘삐딱한 생각’은 반항적이고 도전적이다. 체제나 현실의 모순에 비판적이고 저항적일 것이다. 고로 ‘삐딱한 생각’은 불량하고 불온하니 금물이라는 건가.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고 권한다. 아인슈타인, 밥 딜런, 마틴 루터 킹, 존 레논, 에디슨, 무하마드 알리, 간디, 피카소 등을 소개하며 “여기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 부적응자에 불평꾼, 문제아들입니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사람들이죠. 사람들이 그들을 미쳤다고 할 때 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천재를 봅니다. 정신 나간 사람만이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마련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위에서 열거된 ‘삐딱한 생각’을 한 사람들은 니체가 말한 ‘평생 동안 주인이 주입해준 생각과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짐을 지고 걸어갈 뿐인 '낙타' 같은 존재에서, 자기 반역을 통해 세계를 독자적으로 이해하는 '사자' 같은 존재로 거듭난 사람들 아닐까. 질서를 지키는 게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순응주의자 삶이 정답도 아니다.
상식에 대한 거부, 금기에 대한 도전도 유의미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정관념을 깨고자 하는 파괴본능은 새로움을 창조하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파괴와 창조는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일지도 모른다. 질서에 대한 순응도, 거부도, 모두 답은 아니다. 이게 인간의 부조리(不條理)며 ‘인생엔 정답이 없다’는 이유다.
선과 악, 그 불분명한 실체가 절대화될 때 관념의 폭력은 우리 인간사를 끔찍하게 유린했다. 선악의 이분법적 논리가 무서운 것은 역사에서 많은 죽음과 화를 불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절대화는 수많은 지식인을 죽게 했다. 한국전쟁은 자유주의 공산주의 이념대결로 선악 이분법 싸움이 되었으며, 처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홍위병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문화대혁명도 ‘선악 이분법’에 의한 광기의 시대였다. 수많은 인재가 학살되었고 중국의 유적, 전통문화, 역사적 자료들이 파괴됐다.
마녀사냥으로 대표됨 직한 기독교의 선악 이분법은 인류에게 엄청난 폭력과 죽음을 초래했다. 기독교가 인류사에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은 선악 이원론이라고, 비판하는 학자도 있다.
미국의 오래된 인종차별 문제도 대표적인 흑백논리고 선악 이분법이다.
“좋은 생각”
계몽주의 시대에나 어울릴 것 같은 잡지명이라 생각하며, 관념의 폭력성에 대해 탐색하는데 “김원 씨! 들어오세요” 간호사가 부른다.
수필과 철학이 만나면서 명상의 시간을 주네요.
'다양한 생각'이 세상을 바꾸는 것을 감지하고 있어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