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한다는 건
한영
언제나 소리가 문제였다. 부모님은 노년에 소리 때문에 몹시 불편해 했다. 어머니는 높고 큰 소리에 매우 예민했다. 원래 목소리가 큰 아버지는 평상시대로 이야기하는데도 어머니는 ‘저 큰소리 때문에 내가 죽겠다.’ 얼굴을 찌푸리며 괴로워했다. 어머니가 짜증을 부려도 정작 아버지는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소근 거리듯 말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크게 되풀이했다. 이런 모습으로 티격태격하는 두 분을 보며 생활이 단순하니 소소한 일로 언쟁을 하시나 보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인지 나 역시 소리 때문에 불편을 겪는다. 남편은 종종 같은 말을 연거푸 묻는다. 이미 대답했다고 하면, 내 발음이 예전 같지 않아서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한다. 청력이 문제다, 발음이 문제다 하며 입씨름을 하기도 한다. 남편이 운전할 때 동승하면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깜빡이 좀 끄세요.” 그는 차선을 변경하고도 깜빡이 끄는 걸 잊는다. 다른 운전자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게 되면 위험한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그 똑딱똑딱 하는 소리를 참기 힘들다. 그는 서둘러 끄지만 조금 있다가는 역시 마찬가지다.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한 나의 음성에 짜증이 섞이면 그는 “그 소리가 잘 안 들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무심히 들어 넘겼다. 주의를 집중하지는 않고 변명만 한다고 생각했다. 보통 때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력 검사에서도 큰 문제점은 없어 보였다. 때로는 내가 TV를 보고 있을 때 너무 크게 틀어 놓았다고 그가 면박을 주기도 했으니.
한국 여행 중이었다. 숙소 근처 뒷산에 올랐다. 중턱쯤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데 쓰르라미 소리가 들렸다. 도시에서 자라난 나는 사실 곤충의 울음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신기했다. 그 소리가 내안의 무언가를 가볍게 흔드는 것 같았다. 남편에게 물었다.
“아 좋다, 지금 나는 소리가 쓰르라미 소리지요, 아닌가?” 나도 모르게 들뜬 목소리가 나왔다.
“무슨 소리가 난다고 그래” 남편은 내가 헛소리를 한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나는 소리 쓰르람, 쓰르람 안 들려요?”
“안 들려, 전혀.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바람도 없는 날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라니, 처음에는 남편이 농담하는 줄 알았다. 내가 말하는 것에도 대답을 잘하고 있으니...
“쓰르라미 소리가 참 듣기 좋은데요” 옆에 있던 언니가 거들었다.
그는 약간 멋쩍은 듯 애매하게 미소 지었다. 아, 이 소리를 그가 정말 못 듣는구나. 갑자기 싸-아 하는 바람소리가 내 마음속에 들렸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런 것일까. 나도 어떤 음역, 특히 매우 높은 음 소리에 예민해졌다. 둥둥 울리는 큰 북소리나 높은 음의 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두근두근하여 자리를 피한다. 자기만의 약한 음역이 있는가 보다. 그런 부분을 본인은 잘 모르기도 했고, 살아오는 동안 더 나빠지기도 했겠지. 무언가 능력을 잃어가고,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아릿해진다. 하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삶의 과정이다.
사실 내 가슴이 철렁했던 것은 그의 청력이 저하됐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가 이미 한 말, 아마도 여러 번 했던 말을 내가 듣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자동차에서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그랬는데. 그가 말을 했으나 나는 듣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생각해 보니 이번일 만이 아닌 것 같다.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알아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듯하다. 어쩌면 생각과 감정과 판단의 연결회로에 순환의 어려움이 있었던 건 아닌가? 밀려오는 생각에 무겁다.
하늘은 유난히 청명하고 쓰르라미 소리는 여전히 나무 사이로 흐르는데, 남편은 벌써 언덕을 내려가고 있다. 나도 걸음을 재촉한다. 그와 함께 걸으려고.
무언가 능력을 잃어가고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허무함. 상실감이 절절하게
작품안에 녹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