悟月의 편지
헬레나 배
五月에는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네가 어디에서 울고 있을 것 같아 오늘도 나는 너를 찾아다녔다. 바람 부는 호수 위에 백조 한 마리 떠있었다. 사진을 찍어 주었어. 그녀는 나의 곁에서 물 위에 떠있는 자신의 포즈를 보여주었지. 잠시 우리는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호숫가의 벚나무들도, 가녀린 풀잎들도 바람에 연실 흔들리며 자기 나라 말로 이야기하고 있었지. 나는 들었어, 그들의 대화를, 그리고 조금 이해할 듯도 했어. ‘자연 나라’ 말도 외국어를 배우듯 매일 연습하면 언젠가는 소통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무와 풀들과 꽃들, 그리고 오리 떼들, 거위들, 기러기들, 또 그 밖의 동물들과 길들과 집들과 가구들과 얘기를 할 수 있다면 좋겠지?
이것은 무슨 소리인지? 五月이 오는 소리, 五月의 女神이 비단 옷자락을 길게 끌며 라일락 꽃길을 걸어오는 소리, 그녀가 눈부신 자태로 느릿느릿 걸어온다. 흑진주와 같은 두 눈, 장미같이 붉은 입술, 사슴처럼 우아한 목, 아- 그 맑은 아름다움이여!
너는 五月에 태어나 시골에서 자라났지. 산과 들판을 달음박질치며 마음껏 뛰놀았지. 봄이면 나물을 캐고 진달래 개나리 꺾으러 동무들과 산속 깊이 들기도 하였지. 가을에는 보랏빛 들국화와 갈대와 야생화를 한 아름 꺾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지. 너는 강변에 피어오르던 버들강아지와 수양 버드나무와 성당 가는 길 언덕배기에 흐드러지던 찔레꽃과 장독대 앞에 있던 진분홍빛 맨드라미꽃들과 난쟁이 채송화들과 한 여름날 타오르던 붉은 글라디올러스와 파초와 옥수수나무와 이슬 머금은 호박꽃과 나팔꽃의 영광을, 앞산 양지바른 무덤가에 피어있던 꼬부랑 할미꽃과 이를 모를 풀꽃들을 모두 사랑했었지. 그리고 가을 하늘 아래 걸린 홍시와 미풍에 하늘거리던 코스모스도 참 좋아했었지.
너는 하얀 감꽃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직 푸른 땡감을유리병에 담아 절여 동무들과 함께 맛보며 웃곤 하였지. 너는 촌마을의 캄캄한 여름밤과 총총한 별과 더위를 피해 평상에 나와 앉아 부채를 부치시던 흰 모시 적삼의 할머니들이 두런두런 나누시던 이야기도 좋아했었지. 너는 맑디맑은 시냇가에서 아이들과 헤엄을 치며 놀았고 따갑게 이글거리던 여름의 태양 아래서 메뚜기를 잡기도 했었지. 이따금 사람들이 모여 야유회를 할 때 마을 아주머니들한테서 막걸리를 얻어 마시기도 하였지. 조그만 표주박에 받아마시던 그 막걸리 맛이 어쩌면 그리 달콤했는지-. 그럴 때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너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
너는 탈 없이 잘 자라주었어. 인생이 너를 키운 것이라 할 수 있겠지. 너에게 여고 시절이 있었지. 그때,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우정이 생겼다. 그녀는 눈부신 학 같은 아이였어. 너희는 손을 잡고 수성호수 가를 돌고 있었어. 아마 나타샤의 운명적인 사랑을 이야기했던지, 아니면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노래를 같이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였어. 어떤 할아버지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너희 곁으로 오며 말을 걸어왔지. “학생 둘 다 관상이 좋은데 어디 한 번 봐줄까?” 하며. 너희 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도망치듯 그를 피해왔지. 너희는 무서웠나 보다,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떠한 운명이.
그런데 너는 아직도 그 짧은 순간의 일을 가끔 생각할 때가 있다. 너는 그 할아버지가 과연 어떠한 예언을 너희에게 했을까 하며 지금 궁금해 하기도 하고, 이제 어쩌면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너는 본능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였는지도 모른다. 왠지 그들과 다른 모습일 것 같은, 어쩌면 그건 어느 영화 속의 비비안 리처럼 비련의 여주인공의 모습일지도 모를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너의 뇌리를 스쳐 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네가 그때 너의 벗에게, 강을 거슬러 헤엄쳐 올라가는 연어들의 치열한 생태를 이야기하였는지도.
너는 그것과 비슷한 경험을 한 번 더 해본 적이 있다. 네가 이 먼 나라에 와서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아 기르던 어느 여름날, 홀연히 두건을 쓴 어떤 인디언 점술사가 네게 다가왔다. 그 순간 너는 어떤 다른 차원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 순간은 세상이 사라져버리고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지. 그건 고요하고 평화롭고 시리도록 맑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는 네가 좋아하는 꽃들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너의 생각을 읽었으며 너의 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신성한 사람’이며 너 또한 그러하다고 일러 주었다. 그는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인형을 너의 손에 쥐여주고는 이내 사라져버렸다. 순간적인 그런 우연한 만남이 한 사람의 인생에 아주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천국이 우리 인생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진부하고 긴 인생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너는 알게 되었다.
五月의 女神이 보름달처럼 환한 미소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구나. 그녀의 귀환으로 너의 몸과 마음이 치유되고 있다. 그녀는 알고 있어,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너의 간절한 소원을 말하렴, 아름답고 황홀한 수정궁에서 살고 싶다고- 자, 저기를 보아. 저 투명하고 신비로운 옥색 빛이 감도는 너의 수정 궁궐로 들렴. 네 머리에 수정 금관을 씌어주겠어. 그것을 쓰는 순간 너는 영원한 평화와 행복의 나라에 갈 수 있을 거야.
너는 또한 아름다운 장밋빛 심장을 갖고 싶어 한다. 가없는 사랑의 女神은 네 가슴에서 병들어가고 있는 상처투성이 심장을 들어내고 향기롭고 건강한 선홍빛 새 심장을 넣어준다. 그리고 수심 가득한 네 이마에 살며시 입 맞추어 잠든 너를 깨운다.
눈을 뜨렴, 이제 너는 새로운 세상에 다시 태어난 거야! - 영원하고 시시각각 새로운 삶, 맑고 밝은 생명의 떨림과 신비스럽고 놀라운 질서가 혼연일체로 살아 숨 쉬는 ‘진짜 세상’을 선물 받은 거란다, 이 영롱한 悟月에-.
五月과 悟月.
벌써부터 새롭게 피어나는 5월의 생기가 느껴지네요.
'진짜 세상'을 선물받은 자들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