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타운 미용사
LA 한인 타운에서 일을 마치고 머리를 자르려고 미용실에 갔다.
한 사내가 머리를 자르고, 한 여자는 파마머리를 말은 채 여성잡지를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규모가 크지 않은 미장원이었고 미용사는 머리를 자르다 말고 웃으며 나를 맞이해 주었다. 차례를 기다리기 위해 의자에 앉자마자 어린 딸과 친정엄마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녀를 아가씨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는 검정 미니스커트에 가슴 라인이 보일락 말락 하는 베이지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블라우스는 얇고 투명해 검은색 브라와 몸피가 거의 내비치는 도발적인 옷이었다. 화장을 진하지 않게 해서 얼굴은 청순했지만, 볼륨 있는 가슴은 관능미를 발산하기에 충분했다. 흔히 말하는 S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육감적인 몸매의 소유자였다.
친정엄마와 어린 딸에게 하는 말투는 교양 있는 여자 같지 않았지만,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섹시함은 모든 걸 압도했다. 천박하면서도 청초한, 어찌 보면 백치미(白癡美) 같기도 한 묘한 매력이 있었다. 하여튼 그녀를 보는 사내들 대부분은 질탕한 성적 상상을 먼저 할 것 같았다.
여성들의 야한 화장이나 과감한 옷차림도 자기 연출이라는 주장을 존중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보여 지는 나’는 내가 ‘보는 나’와 다르다. 자기표현이라는 당당한 의도와 다르게 여성이란 인격이 제거된 채 성적 대상물로만 소비된다면 기분 좋을까?
프랑스 철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라캉(1901-1981)의 “욕망이론”에 의하면, 생후 6~18개월 사이 아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실재적 존재라 믿는다고 한다. 거울을 ‘보는 나’와 거울에 ‘보여 지는 나’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주체와 객체, 자아와 세계를 분간하지 못하는 나르시시즘이 지배하는 단계라고 한다. 아기 특유의 고집스러운 행동방식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인간은 ‘보는 나’와 ‘보여 지는 나’ 두 개의 주체가 있다. 보기만 하는 주체,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자아와 상황을 구별하지 못하고 대상과 자신을 일치시킨다. 아울러 타자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식별하지 못하는 오인 혹은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타자의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정신증 환자는 모두 이 단계에 있는 것이란다.
우리 의식은 보기만 하는 시선이 아니라 보여짐(응시)이 함께 하는 중첩적인 것이다. 세계 속에서 인간은 ‘보여 지는’ 존재다. 응시는 주체가 보기만 하는 것에서 보여짐을 아는 순간 일어난다. 자신이 세상에 의해 보여짐을 의식할 때 주체는 고립과 소외를 벗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타자의식」이다. 서양의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공동운명체를 형성할 수 있는 사회의식이다. 자기 멋(주관)대로 행동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항상 이웃을 의식하는 지성도 중요하다.
매사에 지나치게 남의 눈치를 보는 자아 결핍도 문제지만,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안하무인격인 자아 과잉도 문젯거리다.
어디까지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자기표현, 자기연출인지 정답은 없다. 중간의 도(중용)를 찾아가는 길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창조적인 일을 하는 헤어디자이너로서 예술가적 심성을 십분 인정한다 해도, 그래서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개성을 충분 감안한다 해도, 미용사의 포스(force)는 내겐 그저 버겁기만 했다. 그녀의 옷차림이 혹여 공동체의 미풍양속을 교란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면 어쩔 것인가.
각설하고 미용사에게 에로틱한 욕망을 투사한 내가 그릇된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죄가 된다는 기독교식 해석이라면 나는 명백한 잘못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감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살아있는 인간이고, 내 감각에 충격을 준 그녀 또한 잘못 했다는 것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그 경계가 궁금하다. 누구의 잘못도 없는 자연스러움일까. 분명한 것은 행동하지 않는 한 생각만으론 죄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생각이나 사상의 자유는 한없이 보장되는 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한편 사내들은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그 짓거리를 하려 든다고 한다. 수컷의 이 끝없는 교미본능에 의해, 또 암컷의 양육본능에 의해 인류가 보존된다는 것은 섭리라지만 아이러니(irony)다. 야한 여자로서 흘러넘치는 색기(色氣)와 어머니라는 숭고한 의미가 어울리지 않지만, 미용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성(性)의 이중성, 속됨과 성스러움, 추함과 아름다움을 가감 없이 인정한다. 나 또한 욕망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마광수(1951~2017.연세대 교수)는 삼십여 년 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에세이로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는 야한 여자가 불편하다’. 도덕군자는커녕 범부에 불과한 내가 내숭 떨 일도 아닌데 말이다. 더군다나 금욕주의자도 아닌데 여전히 ‘나는 야한 여자가 민망하다.’ 마광수식으로 보면 나는 솔직함이 부족한 위선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성에 대한 관념이 그와 내가 다를 뿐 가식적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세상엔 드러내서 아름다운 게 있고 감춰서 아름다운 게 있지 않을까. 인간의 성(性)이란 은밀함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절대자아(絶對自我)가 있듯 사랑하는 남녀 둘만의 절대(絶對), 그 내밀한 신성함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포르노 비디오가 음란물로 죄악시 되는 건 위해성과 위법을 떠나 둘 만의 절대, 둘 만의 신성함을 손상시킨 데서 기인한 것이리라.
마광수 교수가 “가자 장미여관으로”, “즐거운 사라” 등등으로 성의식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중적 양면성을 비판하며 나름 유의미한 담론을 제기했다.
사회적으로 성이 좀 더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개인적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대체로 성에 개방적인 북유럽 국가들은 민주주의 체제가 성숙되었고, 성에 폐쇄적인 중동 국가들은 민주주의 체제가 성숙되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이란 당연히 여성의 성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다. 즉, 여성의 인권이 얼마나 신장되었나, 이다. 여성이 성에서 자유로운가는 경제적 독립과 유관하다. 여성의 경제력이 남성에 예속된다면 성의 자유도 결코 구가할 수 없다. 성 뿐만 아니라 남녀평등은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 절대적 척도라 할 수 있다. 정치적. 경제적 평등이 전제되지 않는 한, 남녀의 동등한 성적 자유도 성립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성에 이중적이라면 인간의 위선과 거짓이라기보다는,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남성과 대등하지 않다는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 것이리라.
여성이 야할 필요는 없다. 인간이란 인품이 중시돼야지 여자란 이유로 성적 매력이 부각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란 말 속엔 여성을 유희 대상으로만 고착화시키는 편중된 시각이 숨어있다. 남성우월주의가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 볼만 하다.
거창한 의미든 소박한 의미든 한 번쯤은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여성의 성을 정치와 자본주의가 노골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다. 정치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성을 이용했고, 자본주의는 성마저 상품화시켜 구매를 충동질 하는데 활용했을 뿐이다. 남녀평등 지수가 높은 나라일수록 여성들이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남자에게 잘 보일 일이 없기 때문이란다(간택 받을 일이 없음으로). 고로 여성의 외모가 강조되는 사회는 남녀평등이 멀었다는 말이다.
야한 여자가 아니라 멋진 여성이 감수성을 자극했다면 영혼이 고양됐을 거란 아쉬움 속에 미장원을 나왔다.
사실 섹스를 파는 자본주의 대중문화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작가의 관점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한인타운의 미용사가 섹시해서 관능적으로 보여진 것과 여성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사고의 연관성이 탁월합니다.
'야한 여자' 보다 '멋진 감수성의 여자'를 택하신 것에 박수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