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버넷의 속삭임 텍사스 평원

 

 

 텍사스는 들꽃의 나라다. 주화(州花)가 야생화 블루버넷(Bluebonnet)일 정도로 야생화 천국이다. 다른 곳은 모르지만 텍사스 수도 어스틴 근교 들꽃들은 봄가을이면 장관을 이룬다.

 

 어스틴 시내에서 한 시간을 달려 접어든 시골길이라 오가는 차가 없으니 매우 느린 속도로 차를 몰며 조용필이 부르는 들꽃을 들으며 들꽃 구경을 한다.

 “돌 틈 사이 이름도 없는 들꽃으로 산다 해도/ 내 진정 그대를 위해서 살아가리라

 수많은 꽃 중에 들꽃이 되어도 행복하리

 

 들꽃이라고 생물학적으로 학명이 없진 않을 텐데, 관상용이 아니기에 꽃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왜 그 하나하나 이름이 없겠는가. 다만 우리가 모를 뿐이지.

 우리가 흔히 이름 모를 들꽃’, 혹은 이름 없는 들꽃이라 일컫는 것은 들꽃들이 지닌 익명성(匿名性)과 은둔성(隱遁性) 때문이리라. 이름은 있되 알려지지 않은 이름들. 이 때문에 이름은 없지만, 자기 삶을 소신껏 살아가는 우리네 민초(民草)들과 들꽃들은 당연히 정서적 동지일 수밖에 없다.

 또, 들꽃이 지닌 은둔자의 모습은 어떠한가. 인간은 대개 널리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는 공명심이 강하지만, 다른 한편엔 사회로부터 멀리 피하여 숨어서 살고 싶어 하는 은둔성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세속을 벗어나 숨어 사는 은자의 삶이란 들꽃같이 소박하고 맑고 쓸쓸하리라. 하지만 누가 들꽃같이 산다고 헛되다 말할 수 있으랴.

 오래전 문명에 눈을 뜬 인간들은 산과 들에 널려있는 꽃들 중에 유난히 멋있는 것들만 골라와 화단과 정원에 심고 가꿨으리라. 선택받는 꽃들은 이른바 관상용(觀賞用)인 메이저(major)가 되어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가득 받았으리라.

 들꽃들은 어쩌면 선택받지 못한 마이너(minor)들인지도 모른다. 돌보는 이 하나 없을지라도 척박한 땅, 모진 비바람, 온몸으로 견디며 비로소 피어나는 들꽃들. 화단용도 정원용도 관상용도 아니기에 상대적으로 초라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보는 이 없는 깊은 산길에서, 바위틈에서, 들꽃들은 굴하지 않고 피고 지며 그들의 삶을 산다. 들꽃들이 지닌 이 야성(野性)에서 인간은 무한한 경이로움과 자유(自由)를 동경한다. 필연적으로 문명인은 야성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다. 자유를 저당 잡히고 안락한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으로 인간은 어떤 구속도 없는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Hamilton Pool Rd가 끝나고 우회전을 하면 Spur 962번 지방도로가 나오는데, 목가적인 풍경은 그냥 드라이브만 해도 힐링이 되는 시골길이다.

 길옆 숲속의 맑은 시냇물, 형형색색 만발한 들꽃들, 화사한 꽃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 그 이슬 머금은 들꽃 헤치고 팔랑팔랑 뛰어나온 새끼 사슴, 투명한 햇살, 인적 없는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온 천지가 싱그럽고 화려해도 사방이 적요하니 정결하고 신성하다. 무신론자라도 기도를 해야만 할 것 같다. 이 기막힌 정경을 오직 아내와 단둘이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평생 어떤 축복으로도 대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길에서 왼쪽 샛길로 들어가는 시골길은 구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데, 농로라 할 수 있다. 전형적인 텍사스의 평원지대로 목장 길을 한 시간 정도 천천히, 조용히 운전하며 가는 길이다.

 보라색, 노란색, 분홍색, 하얀색, 등의 생기발랄한 들꽃들이 길가 양쪽으로 똑같이 피어있는 모습이 데칼코마니(decalcomania)를 보는 듯 환상적이다.

 한참 동안 데칼코마니 들꽃 길을 지나니 한국의 들국화를 연상시키는 들꽃들이 구릉을 온통 뒤덮고 있다. 노란색 도화지를 깔아 놓은 듯 장관이다. 한국에선 전혀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유채꽃의 노란 물결은 인위적이지 자연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화 속 나라라 해야 할지, 별천지라 해야 할지, 탄성이 절로 나온다.

 

 돌아오는 길에 존슨 대통령 생가 푯말이 보였다. 생가라 하여 집 한 채 있는 줄 알았더니 널디넓은 목장이었다. 그 곳도 들꽃이 장관이었다.

 생가의 들꽃들도 널은 목장에 자연 상태로 피어있어 곱고 청아했지만, 감동이 덜 했던 것은, 알게 모르게 보호를 받는다는 점 때문이었으리라. 존슨 대통령 농장 안에 피어있는 화사한 들꽃들을 방문객 어느 누가 함부로 짓밟고 꺾겠는가.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위험 상태에 완벽하게 노출되어 있지 않은 들꽃이라면 엄밀하게 말해 들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들꽃은 보호받는 꽃이 아니기 때문이다.

 

 들꽃의 미덕은 기름지지 않은 땅, 토착하기 이를 데 없는 땅에서 힘겹게 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들꽃에 대해 한없는 안타까움과 애잔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광활한 텍사스 대평원 인적도 없는 거기에, 저만치 피어있는 들꽃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어여쁘다는 느낌을 준다. ‘아름답다는 말이 주는 화려함과 당당함보다 주목받지 못한 자에 대한 연민의 정이 어여쁘다는 말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힘없고 연약한 들꽃의 아름다움은 군집성으로 완성된다. 들꽃은 하나였을 때는 그 모습이 별로 눈에 띄지도 않는다. 모양이 신통치 않고 초라하기까지 하다. 잘난 것 하나 없는 갑남을녀와 같다. 즉 존재감이 느껴지질 않는다. 그러나 그 볼품없는 들꽃이 한군데 모여 군락을 이루었을 때 그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어떤 장미화도 백합화도 비교할 수 없는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다. 힘없고 못난 백성이 한데 뭉치면 나랏님도 바꿀 위용이 있는 거와 같다면, 엉뚱한 상상일까. 한데 모여 있어야만 존재감이 도드라지는 들꽃들은 서로가 서로를 잘 보살피리라.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고마움을 느끼며 끝없이 아끼고 사랑하리라.

 들꽃은 살며시 나에게 속삭였다. 저희들처럼 이웃을 사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