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본 신라 가시내

 

 

 LA 코리아타운 안에 있는 전치과에 다닌다. 미리 도착하여 무료함을 달래려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잡지나 뽑아 들었다. 아뿔싸 까막눈인 내게 하필 "KoreAm"이란 영어 잡지가 잡혔다. 처음 보는 잡지고 영어를 모르니 내용을 볼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표지가 눈길을 끌었다.

 표지 인물 사진은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으로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미인은 아니나 전체적으론 멋있는 여자였다. 날씬한 몸피에 세련돼 보이는 패션, 헤어스타일, 액세서리, 메이크업 등이 스타일리스트 같았다. 비대칭의 짧은 헤어스타일은 파격이, 재킷을 걷어 올려 나타난 오른팔의 문신은 자유분방함이 돋보였다. 그런데도 진하지 않은 화장은 자연스러움과 지적 이미지를, 쌍꺼풀이 없는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은 신비함을, 마늘쪽 같은 코는 부드러움을, 작은 얼굴은 친근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또래의 한국 젊은이들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밝고 환한 분위기는 한인 이 세나 삼 세 같았다.

 특히 한쪽 팔만 새긴 문신은 언뜻 보기에 고사리 잎사귀 같은 게 팔메트(palmette. 길고 가느다란 잎사귀 모양을 본떠 부채꼴로 꽃잎을 배치한 무늬) 같았다. 문득 에밀레종에 새겨진 장식무늬인 보상화무늬(반쪽의 팔메트 잎 2개를 안으로 향하게 하여 사방으로 대칭시켜 하트형으로 나타냄)가 떠올랐다.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신라 가시내의 머리털 같은’(서정주 시 신록중에서)이라고 노래하던, 그 신라 가시내의 현존(現存)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가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신라는 물론 성덕대왕신종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 우연일지라도 하필이면 팔메트 문양에 마음이 끌렸을까.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했던 건 아닌가. 얼굴 생김새도 중국계나 일본계가 아닌 느낌이지만 팔에 팔메트 문신까지 더해지니 그녀가 한국계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에게 신라의 피는 흐르는 것일까.

 그녀의 문신을 보며 나도 그녀가 한 것과 똑같은 문신을 해야지 마음 먹었다. 물론 그녀를 흉내 내 문신을 한다 해도 오십 중반을 넘어가는 내가 그녀처럼 젊어지는 건 아니다. 또 내가 타투를 하면 아내는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신을 하고 싶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공자님 말씀이 만고의 진리도 아니고, 고대인들처럼 문신 도안이 질병이나 재앙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효과가 있다고 믿으면 그만 아닌가.

 

 집에 와서 인터넷을 검색하여 이 잡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Kore Am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1990년 정 Shig 류와 제임스 류에 의해 창간 출판된 월간지로 뉴스, 논평, 정치, 문화를 다루는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이 잡지는 눈에 띄는 아시아계 미국인 지도자, 정치인, 예술가, 연예인, 운동 선수 및 기업인을 취재 소개한다고 했다. 약간은 한국의 교양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향기가 났다.

 비록 잡지의 표지 사진이지만 멋있는 여자를 오래간만에 보았다. 요즘은 성형과 메이크업의 발달로 예쁜 여자 보기 보다는 멋있는 여자 보기가 더 어려운 세상 같다. 고가의 명품 옷을 입고, 명품 액세서리를 하고, 명품 가방을 들고, 한껏 멋을 냈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천박해 보이는 여자가 있다. 그것은 그녀에게서 풍겨나는 내면적 성숙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면적 아름다움이란 돈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단 시간 내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쁜 얼굴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기에 노력 없이도 얻어지는, 어찌 보면 불로소득 같다. 그러나 멋은 얼굴이 예쁘건 예쁘지 않건 자신의 노력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기에 값진 것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외면과 내면의 노력이 결합돼야 나오는 것이기에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멋은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유행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개성이 만개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걸칠 수 있는 액세서리가 아니다. 멋은 어떤 보석도 그 아름다움에 견주지 못한다.

 어쩌면 신라 가시내일지도 모르는 멋있는 그녀, 그가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