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키
LA 근교 아침, 아들을 배웅하는데 위층에서도 한 여학생이 자전거를 끌고 내려왔다. 같은 층 옆집은 서로 인사하고 지내지만, 위층 집들과는 전혀 인사가 없으니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한다. 일찍 나가는 걸 보면 부지런한 대학생 같아 보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직장인인지 대학생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앞모습은 볼 수 없었고 뒷모습만 잠깐 보았기 때문이다.
아. 그 모습, 스쳐 지나가는 순간의 모습에 나는 마음이 막막해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한참 동안 보았다.
머리는 뒤로 묶은 채 긴 다리의 윤곽이 드러나는 청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은 너무도 심플해서 꾸민 흔적이 없어 보였다. 단정하나 화려할 것 없는 그저 스포티한 차림이었지만 가슴을 먹먹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젊음의 에너지랄까, 젊음에서 발산하는 어떤 기운이랄까, 그림으로 치면 맑디맑은 담채화(淡彩畵), 향기로 치면 라일락, 자태로 치면 피어나기 바로 직전의 목련꽃 봉오리... 도대체 뭐라 형언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입은 ‘빛바랜 청바지’는 시간이 주던 쇠락과 무정함 대신 새로움과 가능성만으로 탄력이 넘쳤다. 또 그녀가 탄 ‘새빨간 자전거’는 문명이 주던 가식과 복잡성 대신 정직성과 단순성으로 어디든 달려갈 태세였다.
자연스러움과 순수함 속에 깃들어있는 어떤 것과도 비견될 수 없는 눈부신 아름다움. 젊고 풋풋한 모습에 싱그러운 생명력이 아침햇살만큼이나 찬란했다. 감히 어떤 사특함도 끼어들 수 없는 순결함, 그 자체가 줄 수 있는 감동과 감격. 섹시함 같은 성적 매력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그러나 뭐라 말할 수 없는 순정한 아름다움, 그 자체가 가슴을 아득하게 한 것 같다. 분위기는 좀 다르지만, 송수권의 시 “여승”에서 보았던 아름다움 같았다. 마지막 구절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는 마음 같았다면 이해가 될까 싶다. 여성의 아름다움이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감동적일 수 있다는 걸, 오십 중반 늦은 나이라도 보게 돼서 감사하다.
꽉 막힌 고속도로.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출근 시간 LA로 진입하는 고속도로는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그 틈바구니 속에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 중인 아가씨를 보다. 오십 평생 처음 보는 광경이라 놀랍고 신기했다. 검정색상의 가와사키 닌자 ZX-14를 타고 검은색 바지와 재킷을 입고 자그마한 백팩을 메고, 검정색 장갑, 구두, 플페이스 헬멧을 착용했기에 얼굴은 전혀 볼 수 없었다. 흡사 닌자 만화에서 금방 튀어나온 주인공 같았다. 그러나 날씬한 몸매와 한데 묶은 듯 등 뒤로 가지런히 흘러내린 찰랑대는 생머리는 그가 여자임이 분명했다. 온통 검정색에 어디 한군데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에서 나오는 아우라는 신비롭기까지 했으며 그가 아가씨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백인 아가씨 일까, 동양 아가씨 일까. 히스패닉 아가씨 일까. 이미지는 환상이지만 때론 실체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할 때 그 닌자는 쏜살같이 차 사이를 빠져나가 버렸다.
아쉬웠다.
그녀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만 진하게 남았다. 남자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오토바이를 건장하지도 않은 여자가 다룬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 아무리 자유분방한 미국이라도 여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하는 것은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운동은커녕 축구장조차 들어갈 수 없고 운전조차 할 수 없는 중동 국가들이나, 유교적 관습이 지배적인 동양 아가씨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나마 미국이니까 볼 수 있는 풍경일 뿐이다.
스치듯 지나친 닌자 아가씨는 모르긴 몰라도 호기심이 강하고 적극적이며 세속적 가치를 추종하지 않는 자의식이 강한 여성일 것 같다. 사회적 질서나 통념에 맹목적으로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낭만주의자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책임질 일 앞에 여성성을 내세워 모면하거나 회피하려 들지 않고, 당당하게 정면으로 맞서는 독립적이고 도전적인 아가씨일 것이다. 선택되어지기 보다는 자신이 선택하고, 따라가기보다는 자기 길을 스스로 가는 자존심 강한 여성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사랑하고 싶은 여자인지도 모른다.
움직이는 동물이나 사람의 형태를 빠르게 그린 그림 크로키(Croquis)가 글로도 가능할까를 오늘, 처음 생각하다. 능력 밖이지만 하이쿠(17자로 된 일본 단시) 같은 형식으로 아침에 보았던 느낌을 속사화처럼 쓰고 싶었다.
"선택되어지기 보다는 자신이 선택하고, 따라가기보다는 자기 길을 스스로 가는 자존심 강한 여성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사랑하고 싶은 여자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