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과 한국의 명운
양상훈
1. 한국전쟁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미국33대 핸리 트루먼 대통령방에 1950년 6월24일(현지시각,한국은 6,25일) 새벽2시에 긴급 벨이 울렸다. 휴가지에서 무초 주한 미.대사와 딘.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한국 전쟁이 발발했음을 속보로 받게 된다 대통령은 즉시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하여 신속하게 움직이게 한다. 안보리는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바로 38선 이북으로 후퇴 원위치로 촉구한다.
그러나 27일 북한이 이를 무시하자 유엔군을 지휘하는 통합군사령부가 설치되고 맥아더를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격노한 트루먼은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한다.
“미국정부는 우선 안전보장이사회에 38도선 북방지역의 침략세력을 축출하기위한 명령에 신속한 결정을 취한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미국은 평화를 파괴하는 세력을 종식시키려는 안보리의 모든 노력에 아낌없는 원조를 다할 것이다. 상호방위 원조계획에 따라 단계적으로 병력파견과 원조증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 한 장의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서가 곧 미군을 한국전쟁에 참전 하게한 위대한 결정이며 한국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 역사적 순간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은 공산화로 십중팔구 북한 노예로 예속 되었지 않았을까.
미 .영 정상회담에서 영국의 애슬린 수상은 한국을 포기하라고 건의까지 했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 미국은 어려울 때 외면하는 나라가 아니오. 국가 간의 의리와 신뢰란 어떤 것 인가?”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한국인의 은인이다.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쟁에 엄청난 미군병력을 파병한 명분은 국가 간의 신뢰를 지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는 그의 화고한 신념 때문이다.
트루먼 대통령의 위대한 참전 결정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 평화 민주주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위장된 평화의 노래가 하늘을 찌를수록 참된 평화를 더욱 갈구한다. 그 참된 평화는 북한의 핵 포기 ,비핵화 완결위에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찾을 수 있다. 북한의 핵 포기 없이 부르는 노래는 거짓평화의 노래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참된 평화는 알갱이 평화이다. 거짓으로 위장된 가라지 평화는 쭉쟁이 평화요 껍데기평화 일 뿐이다.
북한은 70여 년 동안 남북대치상태에서 호시탐탐 적화를 노리고 정정쳡정 위반을 떡 먹듯이 하고 침략으로 협정을 파괴하고 속여 왔었다. 그들에겐 진실의 DNA가 없다.
남침소식을 접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다음 말을 일갈했다.
“딘,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개자식들을 막아야해 그게 전부 일이야” ( Dean,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 that's all there is it) "하나님께 맹세코 그 자들이 대가를 치르도록 해 주겠어 ”
전쟁 발발 동기는 애치슨 라인으로 1949년 6월 남한에 미군이 철수하자 곧 김일성은 8월에 다시 스타린에게 남침허락을 위해 중공의 병력지원조건으로 허락받았다.T-3 차 등 탱크 및 중무기를 제공약속을 받았다. 공산군은 중무장한 기갑부대를 선두로 평화로운 땅을 피로 물들기 시작, 병력의 숫자나 화력 면에도 중과부적으로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난민들을 앞질러 3일 만에 한 많은 미아리고개를 탱크로 짓밟고 있었다.
2 유엔군의 지원으로 한국은 공산화를 막다.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파병한 16개국, 의료지원 5개국 등 총 21개국이 6.25전쟁에 참전했다. 39개국이 물자지원을 하는 등 총60개국이 지원에 나섰다. 한편 미국은 이와 별도로 남침개시 다음날 6.25일부터 일본에 주둔한 주일 미국해군과 공군병력을 투입했다.
6.28일에 맥아더 장군이 한강이남 영등포에 도착하여 전선을 시찰하고 북한의 남침을 저지할 작전을 구상하였다. 한국의 전황에 따라 한강이 제1차 방어선, 금강이 제2차 방어선 ,낙동강이 3차 방어선으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결국 전선이 밀리고 밀리어 낙동강 전선까지 최후 방어선이 되었다. 적들의 적화공산화를 위한 마지막 9월 총공세의 최종방어선을 사수해야만 했다. 이 전선이 무너지면 대구가 함락되어 바로 포항 임시수도 부산까지 단숨에 공략된다. 낙동강 칠곡군 다부동 전투는 지금가지 가장 치열한 전투로서 격전지 55일간 고지를 10여차레나 뺏고 빼앗기며 북한군 2만4천명, 국군과 유엔군 1만여 명의 사상자가 속출되었다. 이 전투에서 국군1사단(사단장 백선엽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여 대구를 고수하는데 담대한 작전으로 영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동안 밀리기만 하던 전세가 역전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따라서 인천 상륙작전 성공과 맞물려 공산군은 패잔병으로 독안에 든 쥐가 되어 전열을 잃고 퇴각하며 북상하기 시작했다.
전사戰士에 알려진 바로 1사단을 지휘한 백선엽 장군에 대한 일화가 많다. 그는 애국 영웅이며 오히려 미군 장성들에게 더 회자되고 있다. 다부동 전투에서 장병들이 겁이나 움직이지 않자 권총을 빼들고 “내가 앞장 설 태니 만약 내가 후퇴하면 나를 뒤에서 쏘라!” 하였더니 병사들이 용감하게 돌격하여 승리를 이끌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낙동강전선의 마지막 보루의 사수로 적을 거의 섬멸, 유엔군의 전력집결, 대공권의 완전장악 등 막강한 화력으로 반격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통일의 부푼 꿈을 안고 10월초 3.8선을 돌파하게 되었다. 유엔군보다 앞서 진격하여 평양을 탈환하고 제일먼저 입성한 부대가 제1사단이었다. 백선엽장군의 다부동 전투 회고록을 읽으면서
풍전등화(風前燈火)에 당시 조국의 안타까운 운명을 뒤돌아본다.
“전선의 상황이 너무 급해 학도병 등 신병을 받아도 이들을 제대로 훈련을 시킬 여유가 없었다. 이들을 겨우 3-4시간동안 기본적인 소총사격훈련과 수류탄 투척 요령만 습득한 뒤 곧 바로 전선으로 투입시켰다. 희생자는 계속 늘었고 ‘고문관’으로 불리는 신병들은 계속 도착했었다. 한바탕 격전을 치르고 나면 부대원들의 30-40 퍼센트가 사라졌다. 이들을 신병으로 교체했다. 나중에는 자신에게 배속된 분대원의 얼굴과 이름도 모른 채 전투에 나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군적도 없이 죽어간 무명용사들! 그들은 대한민국의 오늘을 떠받친 주역이다.”
1945년 8월에 일본제국주의 패망과 함께 광복을 맞았다. 새 나라를 세울 희망에 가득 찼다. 하지만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었다.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에는 쏘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진주 하여 세계2차 대전기간에 협조적이었던 미국,쏘련 사이가 이념적 대립으로 시작하여 정치적 갈등으로 심화되었다. 결국 남한에만 유엔 결의에 따른 총선을 통해 1948년 8월15일에 정부수립이 추진되고 건국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1948년 정부 건립 후에도 계속된 좌우의 첨예한 대립으로 남한사회의 불안정.
스타린의 세계 공산화 전략 모택동의 전쟁 지원 약속 등에 고무된 김일성의 무력적화통일의 야욕에 비롯된 기습 남침인 것이다.
6.25전쟁기간에 미국편에서 1,789천명의 미군 참전, 36,940명의 전사자, 92,134명의 부상자,3,737명의 실종자, 4,439명의 포로가 발생한 엄청난 희생을 감수 한 전쟁이다.
원래 북한의 남침 계획은 중국내전에서 전투경험 있는 잔병 자유군대 (장개석 군대)투입하고, 중무장한 기갑부대를 앞세워 속전속결로 7주일이내에 적화통일을 하겠다는 작전계획이 초전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6.25 새벽에 일제히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을 3일 동안 강북에서 머물게 한 작전 미스가 발생하였다. 그 원인은 육군 6사단이 춘천에서 적군의 2사단 귀순병의 정보를 터득하여 화력이 적보다 약세상황에서도 전투대비 훈련을 철저히 준비하여 지키며 대기하고 있었다. 춘천시를 진입하는 3,8교 브릿지 주변에서 포위 엄호하여 탱크가 브릿지를 통과할 때 집중적으로 가까이서 명중시켜 섬멸하는 작전이다. 춘천시민들이 피난가지도 않고 포탄을 운반하고 장정들이 밥을 지어 봉사하는 군민합동작전이 된 것이다. 2사단 적군들은 쉽게 통과할 수 있는 브릿지에서 의외로 괴멸당해 3일간의 발이 묶여버렸다. 당황한 북한군은 홍천에 전투중인 북한 12사단의 일부병력을 투입하는 디렘마에 빠지자 북한 전투사령부에서 난리가 나고 사단장을 해임하는 등 곤역을 치루게 되고 작전계획이 수정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한국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증원된 유엔군이 합세한 귀중한 시간을 얻어 남하전진을 저지할 수 있었다.이때 즘 저들의 작전 미스로 군사전문가는 패색의 먹구름이 짙어 질것이라 예단하였다 춘천전투의 지연작전은 적의 전선을 혼란케 하는 큰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우리국군과 대적한 적군부대는 중벌로 처벌되어 그 후 소멸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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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트루먼 대통령과 역사의 무대에서 평화의 사도
트루먼은 1884년 미주리 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2년간 가족과 함께 농장에서 일하였다.1917년 세계1차 대전 중에 포병 소위로 참전, 소령으로 전역, 민주당의 추천으로 카운티 법원의 판사로 선임. 1934년 미주리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 1944년 프렌클리 루즈벨트 대통령의 렁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 취임 3개월 만에 대통령이 갑작스런 사망으로 대통령 직을 승계, 취임직후 독일을 항복시켜 대전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연합군에 항복을 거부하는 일본에 대해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일본을 항복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켰다. 그 후 반쏘 반공을 내세워 “트루먼 닥트린” 을 선포하여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를 탄생시켰다. 한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참전을 결정.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깊어지고 중공군에 대한 핵 공격을 주장한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여 중국과의 정면충돌을 피해야했다. 그러나 한국국민에게는 통일을 눈앞에 두고 아무런 소득 없는 3년간의 전쟁은 너무나 허망하여 휴전을 결사반대한다, 트루먼은 역사의 커다란 무대에서 굵직한 장막을 정리하곤 했다. 미국의 한국참전이 한반도를 통일하지는 못했지만, 북한과 중국의 침략을 방어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국이 정전 협정을 반대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은 1953년 10월 워싱톤에서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이 조약이 1954년 11월에 발효되어 한미동맹의 법적토대가 되었다.
이에 앞서 1950.7.14.일 “대전 협정”을 통한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이양했다. 이중 평시작전 통제권은 1994년 12.월 1일자로 한국군 합장의장으로 전환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시작전권을 맥아더 유엔사령관에게로 반환시키게 했다. 전시작전 통제권은 2017년 10월 현재까지 전환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평소 강대국의 책임은 세계에 봉사하는 것이며.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남한은 미국에서 수만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나라이지만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중요하다. 1950,6.25일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공격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독립 국가를 정복하기위해 군사력을 사용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북한의 남침은 유엔 헌장위반이고 평화를 침해한 것이다. 우리는 이 도전에 정면으로 대항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한국지원에 정당성을 늘 강조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한국전쟁 보고를 받을 때 상황을 그의 딸 마가렛은“ 아버지는 매우 격앙되었고 걱정스러운 표정 이었으며 김일성의 남침소식을 듣고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을 처치해야한다“ 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트루먼은 평소 욕설이(개자식.댐 등) 자주 구설수에 올랐다.
그는 온화하고 결정을 할 때는 단호하고 대담하였다고 한다. 88세로 임종, 부인은 99세로 역대영부인으로서 최장수였다고. 임진각에 트루먼 대통령 동상이 세워져있다. 한국에서 유일한 외국국가 원수동상이다 1949년 주한미군 철수 때 건립하였다.
4. 한미동맹과 국가안보
한국은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 역사적으로 1000여 번의 침략을 받아왔었다. 지정학적인 어려운 위치에서 삼면이 바다로 접하고 지하자원이 부족하여 산악지대가 많다. 자원이 열악한 여건에서 그동안 풍부한 인적 자원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였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 기독교 건국이념으로 건국 이승만 대통령의 리더쉽으로 출발 한 한국은 미국원조로 경제기반을 잡았다. 그 후 70여 년 동안 꾸준한 압축경제성장으로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들어섰다. 개발도상 국가들이 200년에 걸친 발전을 지난 18년간에 완성한 저력을 지닌 우수한 민족으로 세계가 부러워하고 있다..
경제성장과 국가안보는 유능한 외교와 국방력이 뒷받침해야 할 것이다
.한국은 남북대치 상태에서 국가안보를 담보하기위해 엄청난 국방비를 책정하고 있다.
특히 적화야욕에 호시탐탐하는 북한이 핵무기개발로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고 점점 위기를 고조시켜 국내불안과 국제 평화를 파괴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20여 년 동안 핵확산금지조약(Nuclear nonploriferation treaty) 을 탈퇴하고 비핵화 협상에 외면하며 뒤에서 핵을 생산하여 지금 고도화 완성단계에 있다. 특히 제7차 핵미사일 실험을 계기로 한국,일본 미국본토까지 협박하고 있다.
현재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미국에선 혈맹파트너(Vital Partner)관계로 고정하고 있다. 6.25 전쟁을 경험하면서 한국은 미국에 대하여 보은의 나라이고, 미국은 한국에
대하여 보람의 나라라고 한다. 한국이 미국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의존하던 수직관계에서 이젠 한.미.간 호혜원칙을 기반으로 수평적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안보중심에서 경제 문화 교육 등 다방면에 공존의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국가안보가 그 어느 때 보다 가장 중요하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국 러시아 일본 등 모두 적대관계를 유지해왔었다. 주변 이들 국가들이 전략적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현재도 잠정 적국(potential enemy)으로 보고 있다. 특히 미국에 대하여 이들은 다방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실정으로 냉정관계로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한미관계에서 전통적으로 굳건하며 좌파정권에서 한미동맹이 약화되어 우려가 있었으나, 새 정권이 들어서 한미관계가 더욱 강화되고 상호협력이 잘 이뤄지고 있다. 아시아지역에서 미국이 중 러 북을 늘 견제하고 있다. .
미국은 동아시아에 견제하기위해 한국을 교두보로 삼고 귀중한 가치를 공유하며 강력한 교두보를 위해 전략적으로 한국을 지원해야하고 강국으로 육성해야 할 임무를 당연시 하고 있다. 2000 년 1월.8일에 미국 상원에서 1948년 8.15일 이승만 정부에서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 법치를 기조의 동맹관계로 엄중하다는 것을 천명한 바 있다. 지금 태평양 사령부에서 아시아권만을 포용하던 범위를 인도 환태평양 사령부로 전환됨에 더욱 확장하여 한미동맹 관계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다. 국내에서 미군철수 반미구호를 떠들고 외칠수록 한미동맹관계는 더욱 견고해진다. 미국은 95년도 미8군 사령부에 보초를 서 있는 헌병 병사에 반미시위 한국청년이 돌을 던저 머리에 피투성이 되었는데 국내기사로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으나 미국내에는 큰 이슈가 되어 미국민들이 배은망덕의 나라라고 시위를 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까지 나와 심각하게 되자 미정부가 국민에게 해명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소행이 한국 정부나 국민의 소행이 아니고 공산무리들의 간첩 소행이라 하여 조용히 정리해버린 사례가 있었다. 또 95년 세종회관에서 미국대사가 한국 청년으로부터 칼 테러를 받아 국내외 가 난리가 나 외교적 문제까지 비화 되었다. 이때에 미국 CIA에 40여년 근무한 미국시민 한국인 베테랑이 언론 인터뷰에서 이 사건은 불순간첩이 연루된 사건이며 범인이 정부나 국민이 소행한 사건이 아니니 거시적으로 이해 바란다 하면서 해명하였다. 그는 언제나 조국의 국익차원에서 대변하곤 한다.
한미동맹관계라도 갈등과 대립이 있을 수도 있고 적대국의 이간으로 비열한 소행이 일어 날 수 있다. 모든 문제점을 국익에 부응하며 지혜롭게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
북한이 미사일 공격위협에 주눅이 될 필요 없게 되어있다. 우리는 핵을 생산할 기술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 현재 핵을 직접 제조하는 것보다 한미공동으로 전술배치가 당분간 가장 이상적이다. 자체 핵을 생산하려면 NPT를 탈퇴해야하는데 미국과의 협약을 파기해야한다. 한국이 핵을 만들면 일본 대만 사우디 등 국가들이 핵을 개발하는 도미노현상이 일어난다. 현시점에서 경비도 절약하고 절차상에 문제가 없는 전술배치를 하여 이미 완료된 상태다. 깊은 바다 속에 최첨단 잠수함 해상에 최신 항공모함 .대공에 B-57,B-2 등 최첨단 핵 폭격기가 밤낯 대기 중에 북한 전지역 700여 목표물을 빈틈없이 감시하고 있다. 적의 공격기미가 보이면 즉시 레이더를 마비시켜 30초 내에 주석궁 할 것 없이 전 지역을 초토화 시켜버린다. 지구상에 북한지도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북한은 지금도 늦지 않으니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인민을 살리고
정당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공동번영을 위한 민족대열에 동참하기를 간구하는 바다. .
11/15/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