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검을 묻다 / 강돈묵
상수리나무 밑에 도착했을 때 전쟁은 이미 끝나 있었다. 어디에서도 폭연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나무 밑에서 헬기들은 쉬는 듯이 보였다. 그들은 기쁨에 싸여 승전고를 울리는 일도 없었다. 모두가 피곤에 겨워 잠자는 듯했다. 조종사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손자 녀석이 하는 전자게임이 멈춘 것처럼 착각되었다. 고요한 가운데 이따금 거리를 두고 헬기가 한 대씩 내려앉았다.
아무리 파악하려 해도 이 전쟁은 누구와 누구의 전쟁인지 알 수가 없다. 나무 밑의 즐비한 헬기는 엄폐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공격해 오는 자도 없었다. 생명을 보전하기 위한 치열한 전장이 분명한데 쥐새끼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이 고요를 흔드는 것은 바람뿐이다. 그 바람을 타고 헬기 한 대가 빙빙 돌면서 내려앉는다. 고요 속에 갇혀 있는 내 어깨 위로 상수리나무 가지 하나가 추락한다. 서너 개의 이파리를 단 가지 끝에는 도토리가 달려 있다. 도토리 속에 조종사가 있어 비행을 주도하는 듯이 보인다. 이 가지가 땅에 안착하자 헬기 한 대가 늘어난다.
짧은 숨을 몰아쉬며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산 숲정이를 들어가도 시간은 멈추어 있지 않다. 어제의 나무숲이 아니다. 하루가 아쉬운 그들의 시간을 지켜보면서 지나온 세월을 음미한다. 나태하기 이를 데 없다.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소홀했던 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쁜 사람, 나쁜 사람. 누군가 내게 커다란 소리로 비수를 꽂는다. 도토리거위벌레만도 못한 사람. 니가 가장이냐. 니가 인간이냐. 상수리나무 밑에 착륙한 헬기들에서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소리는 그치지 않고, 적막을 뚫고 내게로 달려든다. 그 소리에 사면초가가 된 나는 귀를 틀어막고 만다.
도토리거위벌레가 뇌 속에서 둔한 몸을 이끌고 나를 두드려 깨운다. 벼 쭉정이만도 못한 것이 꼼지락거린다. 등껍질은 거무스레하고 주둥이는 몸뚱이 길이와 맞먹는다. 가을이 되면 제 자식의 앞날을 헤아리는 도토리거위벌레가 개체번식에 들어간다. 튼실한 도토리를 골라 주둥이로 각두에 구멍을 낸다. 구멍 뚫기 작업이 치열하다. 마침내 도토리에까지 구멍을 내면 산란관을 밀어 넣고 알을 낳는다. 그리고는 긴 시간 주둥이로 나뭇가지를 자른다. 칼을 사용한 듯이 잘린 가지는 서너 장의 이파리가 프로펠러같이 달려서 헬기처럼 지상으로 안전하게 내려앉는다. 도토리거위벌레의 모성 본능에 깜짝 놀란다.
도토리 안의 알은 한 주일이 지나면 애벌레로 깨어난다. 도토리 열매를 먹이로 스무날을 자란 애벌레는 비로소 밖으로 나와 흙집을 짓고 땅속 생활을 시작한다. 어둡고 껌껌하고 지루한 땅속 생활은 추운 겨울의 시간이 얹어진 후에 온 세상이 푸름으로 널브러진 오월까지 계속된다. 애벌레는 번데기에서 다시 태어날 꿈을 키우고 성충이 되어 도토리거위벌레의 삶을 이어간다.
도토리거위벌레의 개체번식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온다. 아내의 옆을 지키고 앉아 있기조차 버겁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 무게를 지니고 아프게 어깨를 누른다. 남매를 낳아 가정을 이루어 내보내긴 하였어도 저토록 절절한 마음을 실어보지 못했다. 늘 일에 미쳐서 마음은 밖으로 돌았고, 제대로 가정에 놔두질 못했다. 자식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언제나 큰소리로 탓하거나 나무라는 모습이었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집안을 뒤집어 놓는 존재였다. 살가운 사랑은 아니어도 아비로서 자식들의 미래를 열어 주는 조언 한마디 한 기억이 없다. 아이들이 이럴진대 아내의 가슴에 박힌 한숨은 얼마나 클까. 지나가는 말이라도 다음 세상에서 나와 살 것이냐는 물음조차 아내에게 할 수가 없다. 참 나쁜 사람의 못된 삶이었다.
바닷가에 나와 갯바위에 앉아 있다. 한참이나 스치는 바람에 매섭게 채찍 당한 볼이 얼얼하다. 머리를 쑤셔 박고 들지 못한다. 부끄러운 몸을 숨기려 해도 숨길 곳이 없다. 바닷물도 무섭도록 시퍼렇고, 오늘따라 맑고 깊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본 기억조차 없다. 그러니 무슨 반성인들 했겠는가. 오로지 앞만 보고 일을 찾아 헤매는 게 최선으로 알았다. 그 삶이 십 대부터이니 열심히는 살았으되 남아 있는 사랑의 흔적은 없다. 모두가 내 기준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고 존재했다. 온정의 비가 내려도 마음은 바윗돌처럼 굳어 있어 고이질 않는다. 가장 신뢰할 가족들에게도 편안함 없이 불안하니 딱한 노릇이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머릿속으로 상수리나무 밑의 헬기들이 날아든다. 전쟁이 아니었다. 이기에 차서 자신만 헤아린 내 삶에 차단기를 내리는 혹독한 현장이었다. 희뿌연 시야가 열리면서 쓰러진 나의 시신이 들어온다. 아집투성이인 몸뚱이가 부끄러움에 떨고 있다. 헬기의 공격으로 무참히 살해당한 내 모습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배려치 못하고 욕심에 찬 삶을 꾸린 자가 죽는 처절한 현장이다. 낭패한 못난 나의 시체가 분명했다. 여기저기 보이는 헬기에는 아내가, 아들이, 딸이, 이웃에 사는 영희와 철수가 앉아 있을 것이다. 바라보기에도 역겨운 내 주검을 지켜보고 있겠지.
갯바위에서 일어나 상수리나무가 있는 숲으로 향한다. 이제라도 추악하게 찢긴 내 주검을 거두어 묻어 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