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이 다가온다. 아들이 어버이날 선물이라며 현금 봉투를 건넨다. 자식이 준 봉투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있다.
그때도 어버이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용돈이라도 얼마 챙겨 보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나는 고향을 떠나 어머니와 멀리 떨어져 살고 있고, 어머니는 고향에서 형님과 함께 살고 계셨다. 나는 둘째 아들이란 핑계로 어머니 부양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명절이나 되면 한 번씩 올라가고, 이따금 용돈을 조금 보내드리는 것으로 자식의 도리를 다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
팔순 어머니의 위독하다는 소식은 나의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마음만 바빠 허둥댔지 밤늦게 출발하는 야간열차밖에 시간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느린 야간열차는 완행열차처럼 더디게 움직이며 내 마음을 답답하게 했다. 눈을 감으니 아버지 돌아가실 때도 그랬던 것처럼 후회가 왈칵 밀려들었다.
나는 결혼도 하기 전이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후 한 번도 깨어나지 못하고 열흘 정도 연명하던 삶이 끊어졌다. 그래서 아버지와 한마디 이야기도 주고받지 못하고 이별하고 말았다. 내가 너무 무심한 탓에 부모님 찾아뵙는 걸 소홀히 하여 끝내 아버지 운명 직전에야 찾아뵙는 불효를 저질렀음에 후회했다. 그때 홀로 되신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었다.
그러나 마음은 그냥 마음뿐이었다.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마음이 무슨 소용이랴. 그동안 내 가정을 꾸렸고, 처자식의 생계에만 온통 마음을 빼앗기다 보니 그날의 생각은 점점 잊혀갔다. 명절이나 무슨 특별한 일이 있어야만 가던 나의 일상은 늘 그대로였다. 자주 찾아뵙겠다는 마음속의 약속은 빛바래듯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올라가게 되니 옛 생각이 나서 마음이 착잡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훤하게 밝았다. 새벽의 상큼한 공기와 달리 병원의 공기는 탁했다. 어깨 처진 의사들의 걸음걸이가 어젯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듯 힘들어 보였다. 나는 병실의 호수를 읽어가며 어머니가 계신 곳을 찾았다. 위독하다고 했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숨을 멈추며 조심스레 병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병실에 있는 식구들의 얼굴은 어둡지가 않았다. 내가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의식을 되찾고 사람들을 알아볼 정도로 상황이 좋아져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 손을 꼭 잡으니 동공 풀린 눈을 힘겹게 뜨시며, 나를 알아보고는 힘들게 왜 왔냐고 어렵게 말을 잇는다. 목숨 줄을 놓을 뻔했던 어머니가 그 순간에도 밤차 타고 왔을 자식 걱정이었다. 부모님이 자식 걱정에서 해방되는 날도 있을까. 큰 병이라기보다 기력이 쇠약해져 위험했던 어머니는 이튿날 퇴원하였다. 나는 출근을 해야 했기에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퇴원한 지 한 달쯤 지나 어머니를 뵈러 큰집에 갔다. 그동안 전화 통화로 많이 좋아졌다는 형님의 전언은 매일 있었지만, 어머니의 전화 목소리는 늘 힘겹게 들렸다. 행여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누워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조아려왔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큰집에 들어서니 어머니는 예전처럼 아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완쾌한 몸은 아니었지만,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혼자 화장실에도 가고, 거실에 나와 잠시 앉아계시기도 한다고 했다. 좋아지고 있는 모습을 내 눈으로 확인하니 어머니가 더 건강해 보였다. 마음이 달뜬 나는 형님과 술도 한잔했다. 그리고 불콰해진 얼굴로 베개를 들고 어머니 방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방도 좁고 냄새도 나니 다른 방에 가서 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응석 부리는 아이 모양 어머니 곁에 누웠다. 어머니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자식들 키우느라 평생을 고생하신 어머니의 거친 손에서 따뜻한 체온이 가슴으로 전해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길이 가벼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석이 되어 고향을 또 갔다. 어머니의 건강은 전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형님이 슬쩍 귀띔해 주었다. 어머니는 나와 같이 잔 것을 오는 사람마다 자랑하셨단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무엇이 그토록 어머니를 좋아하게 만들었을까? 불혹을 훨씬 넘긴 아들의 거친 숨소리가 그리도 좋았을까, 아들에게서 나는 술 냄새가 그리 좋았을까? 아니, 어머니는 등 구부리고 쪼그려 자는 모습에서 어리광부리던 아기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엄마 품에 안겨 새우잠 자던 꼬마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간단하게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을, 어머니의 행복 찾기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나의 미욱한 삶에 가슴이 아려왔다. 그래도 소소한 일상에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기쁨에 설레기도 했다. 이제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고 잠도 같이 잘 것이라 마음 굳게 다짐했다.
어느 때보다 즐거운 추석을 보내고 돌아왔다. 추석을 보내고 돌아와 보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마음이 편해지는가 싶은데 느닷없이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가 왔다. 밤새워 병원에 도착했건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침에 갑자기 기도가 막혀 병원을 찾았는데 끝내 이겨내지 못했단다. 전날 저녁에도 치마를 꿰맨다고 바느질까지 하셨는데 느닷없는 변고에 모두 넋이 나간 모습들이었다.
이제 어머니의 곁은 없다. 어머니 곁에서 하루라도 더 함께하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주자는 ‘부모 살아계실 때 효도하지 못하면 부모 죽은 후에 후회한다(不孝父母 死後悔).’라고 했던 모양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거창한 효도를 바라는 게 아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는데 하지 못한 아쉬움에 지금도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민다. 어버이 없는 어버이날은 또 돌아오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