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랭지의 바람 / 이정애
격월간지 『안동』에 기고할 현장탐방 취재차 안동농협공판장을 찾았다. 사과 경매에 관한 취재이다. 공판장은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와 인접(500m 거리)하여 교통이 편리하고 접근성이 뛰어나다. 큰 도로에서 공판장 쪽으로 오르면 왼쪽에 안동농산물처리장이 있고 오른쪽에는 청과합자회사와 농산물공판장이 마주 보고 있다.
지금은 새벽 6시다. 어둠과 안갯속에 층층이 사과 상자를 실은 트럭이 공판장으로 올라온다. 차가 주차장 턱을 지날 때 흔들리는 모습에 그곳을 지나던 내 마음도 함께 아슬아슬하게 턱을 넘는다. 사과 상자를 높이 실은 트럭이 마치 한 채의 축소된 아파트 같다. 차들은 쉼 없이 드나들고 공판장 한 귀퉁이에는 이미 출하된 빈 상자를 쌓고 있다. 공판장 건물은 직사각형 모양인데 가운데쯤 출하자 휴게실이 있다. 휴게실 창문에 붙여놓은 순번 표를 보는 사람들은 밀린 번호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휴게실 안으로 들어간다.
네댓 평 되는 휴게실 안에는 TV와 몇 개의 의자가 있고 안쪽에는 누울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다. 거기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잠에 곯아떨어져 있다. 야윈 어깨가 모로 누운 채 벽을 향해 있다. 저렇게 작은 몸으로 무거운 사과 상자를 어떻게 들고 날랐을까 의구심이 든다. 아버지도 저렇게 주무셨을까! 옛날에는 과일 운반 트럭이 밭으로 오면 아버지는 그 차로 가셨다가 다음날 경매를 보고 왔다.
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휴게실 안쪽을 방으로 쓰니 사람들이 드나들 때마다 찬바람이 일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환경이 더 열악했으니 말해 무엇하랴.
휴게실을 나오니 선별장에 들어가는 문이 바로 앞에 있고 들어가서 왼쪽에 자동선별기가 돌아가고 있다. 곁에 바짝 세워둔 트럭에서 내리는 사과가 한눈에 봐도 좋아 보여서 어디서 왔는지 사과 주인아저씨께 여쭤보았다. 영양에서 새벽 2시에 출발했다고 한다. 명함을 건네고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아저씨는 사과를 선별기에 부으며 빛깔 좋은 것 하나를 건네준다.
“와, 농사 정말 잘 지으셨네요. 올해는 태풍도 지나갔는데 사과가 괜찮았나 봐요.”
“아이구, 우리사 영양 고랭지에서 농사짓기에 태풍에도 끄떡 없니더. 해마다 보험을 넣을 필요도 없다니까요.”
높은 지대라서 평소에도 바람은 늘 있기에 사과도 웬만한 바람에는 면역이 생겨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저씨는 지친 기색도 없이 나에게 말을 하면서도 사과 상자를 선별기에 내려놓는다. 그러면서 제일 예쁜 것이라며 또 하나를 내게 준다.
“함 맛보래요. 다른 데는 태풍으로 난리 났다 카드만 우리사 마 그래서 시세가 더 좋잖니껴.”
태풍도 견뎌낸 고랭지 사과의 맛이 궁금해서 옷에다 쓱쓱 문질러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껍질이 까슬까슬하고 향이 입안 가득 번졌다. 단물이 턱과 손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태풍에 두들겨 맞으며 흔들림을 견딘 사과는 단단했다.
선별장 안쪽에는 선별된 사과가 질서 있게 쌓여있고 그 너머에는 한창 경매가 이뤄지고 있었다. 시원하게 뿜어내는 목소리가 단전에서 끌어올리는 동굴 저음이다. 모스 부호로 만든 암호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다. 일정한 호흡이 깔린 외침에 사업자를 가진 중개인들이 리모컨을 누르면 낙찰이 된다. 그러면 축구선수처럼 등판에 숫자를 단 직원들이 낙찰된 상자 뚜껑을 닫고 낙찰서를 작성해서 붙이면 끝이 난다. 말이 필요 없다. 집중이 필요한 일련의 과정을 금방 알아차리지 못해 처음에는 당황했다. 아마도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손들고 경매하는 장면을 연상해서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주머니 속 리모컨 하나로 모든 게 이뤄지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동안 부업으로 재배한 사과를 순번 받은 차량을 통해 경매장에 넘겼으니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지 못했다. 초보 농사꾼을 벗어난 지 한참인데 아직도 걸음마 수준이다. 올해는 인부들 시간에 맞추느라 일찍 출하했다. 얼떨결에 보내버린 열매들 생각에 마음이 헛헛했다. 경매장에 가득 쌓인 사과를 보고 있자니 영양 산골 농부께서 말씀하신 “웬만한 바람에는 낙과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바람을 견디기까지의 고난이 그 웬만한 속에 들어있으리라.
올해 우리 농장에는 긴 장마와 태풍으로 사과피해가 컸다. 사과나무 몇 그루는 뿌리째 뽑히고 수십 그루가 쓰러지고 가지는 찢어졌다. 낙과보다 내년 농사에 지장이 있을 나무의 상태가 더 큰 문제였다.
“바람은 하늘의 일인기라.”
그 옛날 전국을 강타한 태풍이 우리 집 한해 농사를 초토화한 적이 있었다. 그때 며칠 만에 밭에 나가시며 하시던 아버지의 혼잣말이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했다. 간당간당하게 매달린 열매처럼 흔들리던 나는 아버지의 그 말에 기대어 남편과 함께 맥없이 쓰러진 나무들을 일으켜 세웠다.
살다 보면 고랭지 바람이 어디 영양 산골에서만 불겠는가. 공판장에서는 하루하루 시간을 다투며 들어오는 물량에 따라 가격이 오르내린다. 그럴 때마다 농민들이 시세에 따라 울고 웃는 일련의 과정도 크고 작은 바람이리라. 경매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오니 어느새 안개가 걷혔다. 과일을 부려놓은 빈 트럭이 바람처럼 시원하게 빠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