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도(母子圖)/오덕렬

 

 

노송 한 그루가 시원히 그늘을 치며 반기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 마음은 벌써 고향집에 가 있고 어머니와의 대화는 시작된다. 찻길에서 시골길로 접어들어 싸목싸목 십여 분쯤 걸었다. 노송의 그늘 아래에는 침묵의 너럭바위가 있어 천년 세월을 함께 지켜 오고 있는 것이다.

노송과 너럭바위가 해로(偕老)하는 부부같이 다정한 이곳을 우리는 '독백이'라 부르고 있다. 산기슭의 모롱이인 독백이는 고향 마을로 가는 길목에 있다. 여기선 갈 길 먼 길손도 쉬어 가고, 바쁜 농군도 긴 여름날 한나절 고된 일손을 놓은 채 신선이 된다. 고향 찾는 길, 독백이에 이르면 이삭처럼 흘려 있는 고향의 정담을 줍기에 바쁘다.

어린애처럼 희망에 부풀어 꿈길에도 오가던 고향 길은 지심(地心)만 리, 저 밑에서 토해내는 열기로 확확거렸다. 보리밭 사잇길로 접어들자 어머니의 체취 같은 잘 익은 보리 내음이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둘러싼 세상살이의 어려움은 아침 햇살에 쫓기는 어둠같이 사려 갔다. 마음은 텅 빈 무념의 상태라고나 할까?

모천(母川)을 찾아 파도를 비상하는 회귀어(回歸魚)가 되어 고향 찾는 길에 독백이에 머물러 쉬고 있다. 너럭바위에 지난 일이 그립게 떠오르고, 여기가 보통이 아닌 곳만 같아진다. 무릉도원이 따로 있지 않을 것도 같다. 노송은 너럭바위로 하여 한층 더 높은 격을 얻었다. 너럭바위 또한 노송으로 하여 다사로운 혈맥이 돌아 부처님 같은 인자한 가슴을 열게 되었다.

노송과 너럭바위, 이 오솔길에까지 풍류를 잃지 않은 자연의 조화가 놀랍기만 하다. 노송은 달밤이면 하늘에서 솔솔 내리는 설화(設話)의 명주실 타래를 사려 왔는가 보다. 줄기의 가슴팍 한복판에는 구멍이 훵 뚫렸으니 말이다. 아니 계집 죽고 자식 죽은 산비둘기의 애닯은 사연과 함께 너럭바위에 앉은 모든 속세의 얘기는 소나무의 가슴팍을 타고 승천하여 별나라 선녀들의 정화(情話)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만고풍상을 전신에 받으면서도 푸르름을 머리에 인 고목이 된 소나무다. 그러나 천수를 다하는 날까지 영성(零星) 성겨지는 청솔가지 뻗어 그늘을 드리울 것이다.

세월 따라 몸통은 삭혀 푸르름으로 승화시킨 소나무다. 어떤 풍우에도 청아한 목소리로 솔바람을 보내고는 이렇다할 말이 없다. 바람 그치면 묵묵히 하늘 향한 마음에 변함이 없다. 젊은 날에는 울울창창 푸르다 못해 검푸른 솔잎으로 그늘을 드리웠으리라. 이제 성긴 솔잎 새로 반짝 햇살이 웃고 있다. 조용히 미소로써 보이는 여유요, 달관인 것이다.

어찌 보면, 어머니의 모습 같기도 한 노송, 그 품에 안기니 지난날은 여과되어 청수(淸水)처럼 맑아 온다. 이러한 독백이는 나에게는 모정(母情)을 뜨겁게 느꼈던 곳이요, 저 너머 멀리의 푸른 꿈을 꾸어 보던 곳이다. 늘 타관으로만 떠돌아온 나는 이곳에 미운 정 고운 정이 남다르다. 나에게 독백이는 자연 공간의 한 지점이 아니고 앞을 조감해보는 내 인생의 길목처럼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독백이에 유별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벌써 오래 전 자취하던 학창 시절의 일이다. 지열(地熱)은 익어서 소나기를 장만하고 있던 여름날의 오후였다. 호박잎도 숨을 죽인 울타리 밑에서, 닭들도 모가지를 늘이고 날개를 벌린 채 헐떡이고 있었다. 타는 듯한 더위 속에 고향집 마당에서는 보리타작이 한창으로 보릿누리가 헐러져 홀태 밑에 보리알이 수북이 쌓이고 있었다. 유일한 생명선이었던 보리알, 그 곱삶이에도 희망이 함박꽃처럼 피어났고, 바윗돌 틈새를 흐르는 샘물처럼 맑게 천품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비바람에도 독백이의 노송처럼 푸르름을 간직할 뿐 별 말씀이 없으신 어머니의 감화력 때문이었다.

고향집에 도착했을 때, 아직도 해는 칠봉산 위에서 저녁놀을 우리며 이글거리고 있었다. 어미는 남새밭 상추에 식은 밥 한 덩이를 받쳐 주셨다. 그 까만 꽁보리밥의 맛은 잊혀지지 않는다.

"밥아, 너 본 지 오래로구나!"

한 입 쓸어 넣던, 이 도령이 먹던 밥은 넉살이었지만 내가 먹은 밥은 꿀맛이었다.

우리네 생활은 항상 오늘보다는 내일을 바라보며 둘려서 사는 것이지만, 그 여름의 현실은 너무 아팠다. 보릿고개를 막 넘긴 뒤라서 보리로 돈을 살 겨를도 없었다. 그때 사정은 자세히 생각나지 않으나, 어찌된 일인지 자취 짐도 챙기지 않고 빈 몸으로 집을 나서고 말았다. 학교를 그만 두겠다는 성급한 결단이 섰었던지 독백이의 노송 밑에 머물러 앉아 '배움'과 '인생'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했던 것 같다. 고개를 떨구고 두 눈에서 고뇌의 찌꺼기가 밥물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을 때였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 오는데 심골(心骨)을 파고드는 인기척을 느꼈다.

"아가, 서나서나 맘 먹어라."

꿈속에서 아련히 들려온 달인(達人)의 말씀처럼 온몸에 퍼져 절절하게 파고들었다. 어머니가 옆에 와 계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요지부동 말이 없었다.

"아나, 요것 가지고 가그라. …꿨다."

어머니의 음성은 속으로 속으로 스며들어 한이 되는 듯했다. 떨리는 음성과 함께 호미자루에 닳아 지문도 찾을 길 없는 어머니의 손엔 똘똘 말린 몇 푼의 돈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순간 벌떡 일어나 걸음을 재촉하고 말았다. 그냥 그대로 어머니의 모습을 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멀어져 가는 나를 향해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하며 내 이름만 분간하기 어려운 목소리로 부르다가 노송 밑에 그대로 서시는 것이었다. 벌써 산비탈 밭엔 푸른빛이 깃을 접고, 저녁놀은 어머니의 후광처럼 서녘 하늘에 물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인고(忍苦)의 세월자락 누빈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계셨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꼼짝 못하고 서 있었다.

한참 뒤, 어머니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저녁놀이 고운 재 너머의 하늘을 우러르고 계셨다. 어머니의 모습은 간절한 소망을 간구하는 장하고 거룩한 보살이었다. 어머니는 정화수 상 앞에서 머리 곱게 빗고 두 손 모아 천지신명께 빌던 그런 바람으로 서 계셨다.

몸통은 파이고 가지는 휘어도 노상 푸른 솔잎을 받쳐 푸른 하늘을 이고 있는 한 그루 노송을 배경으로 한 어머니, 그때의 당신 모습은 영원한 모성의 화신이었다.

독백이를 지날 때면 모정이 웅숭깊은 한 폭의 모자도(母子圖)를 머리 속에 떠올리곤 한다. 고독한 내 영혼을 어루만져 줄 영원한 모자도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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