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동으로 가는 길 / 이정호

  추운 날씨였다.  지하철에서 내려 장충동 가는 길로 올라갔다.  몇 십년만에 이 길을 걷는 것인가.  두꺼운 목도리와 귀까지 덮는 모자가 추위를 막아 주었다.  얼마를 올라가니 화려한 불빛 속에 있는 빌딩이 나타났다.  앰베서더 호텔이었다.

  의식에서 깨어나지 않는 아버지를 돌보면서 잠깐 이 행사를 위해 외출을 허락 받았다.  기나긴 터널에서 어두움과 고통속에서 싸우고 계시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나는 묵묵히 찬 바람을 맞으며 장충동 길을 걸어 올라갔다.  아는 친구들이 한 두 명 나타났다.  푹 뒤집어쓴 모자 때문에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십년 만에 처음 참석하는 2020년 동성고등학교 송년의 밤이었다.

  호텔 안 모임장소로 들어갔다.  벌써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있었고 테이블은 거의 다 찼다.  샹들리에 밑으로 보이는 얼굴들은 그랜드 볼룸홀을 빽빽하고 작게 만들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나를 누군가가 안내해 주었다.  앞쪽 가운데로 가니 49회 동기들이 않는 테이블이 있었다.  반갑고 낮 익은 친구들은 벌써 와있었다. 

  사회적으로 알려져 있는 선배들도 눈에 띄었다.  영화배우 안성기가 우리 학교 선배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보다 4년위인 45회 선배였다.  박근혜정부 비선실세 국정농단 의혹을 수사한 특별검사팀장 박영수 선배도 볼룸 중간 정도에 앉아 있었다.  젊은 후배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대부분이 나이가 들은 선배나 우리 또래, 아니면 우리보다 조금 젊은 층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여흥의 시간이 왔다.  ‘울게 하소서’ 를 부르는 애처롭고 청령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청바지에 와이셔츠 캐주얼 차림의 팝페라 가수 정세훈이었다.  목소리는 가냘펐지만 울려 나오는 소리는 그랜드 볼룸홀을 가득 채우도록 메아리 쳤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가수였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오래 전에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동양션교교회에서 공연을 할 때였다.  그때의 인상깊고 감명스러운 목소리를 기억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옥소리와의 스캔들로 무대에서 오랫동안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가 다시 나타나 아주 가깝게 볼 수 있었다.

  그가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 현재 총동창회장직을 맡고 있는 이만득 회장의 도움을 많이 뱓았다고 한다.  그러한 관계가 있어서 기꺼이 이 모임에 와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승낙했다고 한다.  만득이는 삼천리 그룹의 명예회장직을 맡고 있는데 나하고는 1학년 4반 같은 반이었다.

  간간히 래플티켓을 뽑는 순서도 있었다.  상품은 잘 당첨되지 않는 편이어서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티켓 번호가 불려 나왔다.  엉겁결에 무대위로 빨리 올라갔다.  한 번에 대여섯명을 뽑았다.  그들이 모두 올라와서 무대위를 꽉 채웠다.  그리고 한 명씩 확인하고 경품을 주기 시작했다.  내 손에는 공진당이 주어졌다. 

행사가 다 끝나고 밖으로 나왔다.  내 옆에 앉았던 인용이가 문과 모임이 따로 있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장충동 길을 걸어 내려왔다.  큰 거리가 나오고 횡단보도를 지나갔다.  장충동 족발 식당들이 눈에 띄었다.  그 중에 한 식당을 들어가 2층 구석으로 갔다.  문과 모임은 정기적으로 모인다고 한다.  최근에 본 친구들도 있었고 아주 오래간 만에 본 친구들도 있었다.  먹음직스런 족발이 나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의 추억을 불태웠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친구가 더 그리워지는가 보다.  반갑고 즐거웠다. 힘든 일정 중에서도 오늘 행사에 나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만나지 못했으면  다시 또 만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