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의자

                                   최아란

 

  큰애 친구 중에 한참 어린 동생을 둔 아이가 있다. 둘은 필시 그런 공통점으로 친해졌을 것이다. 예닐곱 살 손위의 맏딸로 살아가는 공감대가 분명 있을 테니까. 주말에 둘이 함께 참여하기로 한 학교 행사의 세부 일정이 나왔는데 저녁 늦게야 끝나겠더란다. 우리 딸이 걱정 삼아 너무 늦는 거 아니냐고 말을 건네니 그 친구 답이 이렇게 돌아왔다.

    난 좋아. 집에 있으면 동생 돌보기 힘든데 잘됐지 뭐.

  아아. 장녀의 고단함이란! 참고로 우리 딸은 동생이랑 주말에 붙어 지내는 게 좋다고 말해서 엄마를 감동시켰다. 아아. 이 후덕한 마음 씀까지.

  글꼴에서부터 언니, 누나라는 말에는 엄마를 흉내낸 넉넉함이 깃들어 있다. 편안한 의자를 닮은 글자 ㄴ이 중심에 놓여 새되거나 거칠지 않고 부드럽고 안락하다. 엄마라는 말만큼 묵직하지 않게 가볍고 발랄하여 동기간의 즐거움까지 느껴진다. 엄마, 어머니에 등장하는 ㅁ이 좀 더 타협 없이 안전한 네모 요람인 것과 비교된달까.

  의자가 되어주는 언니에게 기대어 자매가 도란도란한 모습을 떠올리면 손아래의 어리광도 함께 그려진다. 동그랗게 울리는 ㅇ받침 때문인지 동생이라는 단어에는 귀엽고 앳된 느낌이 있다. 배냇머리 보드라운 머리통이 떠오르기도 하고, 죄 없이 말간 두 눈이 생각나기도 한다. 진득하고 신중하여 귀여움 떠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눈이 큰 내 동생의 혼자 먹는 저녁밥을, 나는 아마 두고두고 안쓰러워해야 하리라.

  오빠라는 단어가 아빠 버금이라는 데서 나왔을 거라는 상상은 쉽게 해볼 수 있다. 나는 연애 때부터 결혼 초까지 남편을 오빠라 불렀는데, 그가 겨우 두 살 차이 가지고 얼마나 어른 행세를 했나 모른다. 뭐든 오빠가 알아서 해준다며 보호자 노릇을 한 것이다. 친가 외가 통틀어 맏이였고 본보기였고 기대치였던 내가 그런 듬직한 오빠에게 홀리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육 남매 막내였던 그는 이 년여 간 오빠 노릇을 옹차게 하더니 지금은 마누라를 믿고 따르는 날이 많다. 물론 듬직한 아빠인 것은 틀림없다.

  아빠, 아버지에 나오는 ㅂ은 커다란 바구니를 닮았다. 넘치지 않게, 새어나가지 않게 뚜껑까지 달려있는 튼튼한 모양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꾸리고 푸는 우리 남편 출장 가방 같기도 하다. 젊은 나이에 애 둘 아빠가 된 일본지사 직원이 40년 상환으로 제집을 지었다고 하자 남편은 그게 다 자신의 빚 같다고 했다. 자기 지략과 건강과 패기로 회사를 건실히 이끌어야 하니까. 그래서 우리 식솔에다 직원들 가족까지 합친 대식구를 먹여야 하니까. 2층짜리 주택 한 채가 또 그렇게 그의 가방에 실린다.

  대신 들어줄 수 없는 그 무거운 가방을 뒤로하고 나는 우리 큰애의 의자가 더 마음 쓰인다. 장녀라서, 나를 닮아서, 나보다 더 마음결이 고와서 넉넉한 니은 자 두 개에 정작 자신은 앉아 쉬지도 못할까 봐. 동생에게 내주고, 친구에게 내주고, 오가다 만난 길고양이에게까지 내주는 착한 아이인데, 염치없이 나까지 가끔 그 의자에 털썩 엉덩이를 걸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아이는 늘 부모의 작은 의자였다. 제 고개를 가누지 못하던 시절부터 나는 잠깐씩 그 의자에 앉아 하소연을 늘어놓곤 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라는 레퍼토리는 지치지도 않는다. 엄마가 다 너를 사랑해서, 라는 말도 얼마나 만사에 얼버무리기 좋은 멘트인지. 그때마다 아이는 제 의자의 크고 작음을 개의치 않고 나를 안락하게 보듬어 주었다.

  그 덕에 나는 외로움에 오돌오돌 떨지 않았고 삐뚤어질 겨를 없었다. 냉소적인 자기연민이 고개를 치켜들다가도 내 등에 닿은 포근한 온기에 기죽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곤 했다. 평화를 갈구하며 치르는 맹렬한 전투 중에도 그 의자에 앉아 쉬었고, 소소한 승리 때마다 그 의자에서 진심 어린 축하와 격려를 받았다. 신세 진 내가 이번에는 그런 의자가 되어야 옳다. 아이가 그러라고 나를 이렇게 충만한 어른으로 키우는 거다.

  마음 고된 이들에게 척척 묘안을 건네주진 못하더라도 잠시 앉아 마음 살필 수 있는 의자가 되어주리라. 속상하겠구나 울고 싶겠구나 편들어주는 언니. 나도 잘 몰라서 그저 옆에 앉아 같이 떨고 화내고 낄낄거리는 언니. 그런데 밥은 먹었는지가 제일 궁금한 언니. 가만가만 너의 등을 쓰다듬어주는 그런 언니, 언니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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