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살아났다. 세실극장이 문을 닫는다고 하자 반발이 심했다. 반세기 가깝도록 많은 사람이 울고 웃던 공연극장을 하루아침에 닫을 수는 없었다. 마당놀이를 보았던 풋풋한 추억 하나가 사라질 뻔한 위기를 넘겼다.
세실극장은 국내 최초의 공연전용 극장이다. 덕수궁 돌담길이 끝나는 성당 한쪽에 자리 잡은 벽돌 건물이다. 세종문화회관처럼 웅장하거나 크지 않고 좌석이 많은 것도 아니다. 부채꼴로 된 좌석 배치 덕에 공연자들의 표정을 잘 볼 수 있었다. 창극이나 마당극은 물론 연극조차 제대로 올릴 공연장이 없던 시절이라 전용 극장의 개관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독특한 현대식 건물에 갈 곳 없던 전통문화가 어우러지는 곳이라 많은 관심을 받았다.
나는 난생처음 그곳에서 토생전을 군복을 입고 보았다. 은행잎이 물들기 시작하는 덕수궁 돌담길을 천천히 돌아 인적이 드문 작은 길로 접어들었다. 공연시간이 많이 남아서 그런지 돌계단 출입구는 북적대지 않고 한산했다. 푹신하고 두툼한 의자에 앉으니 무대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 딱딱한 의자가 숨 막히게 배치된 일반 영화관과는 느낌이 달랐다. 나는 조용히 모자를 벗고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바깥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서울의 봄이니 뭐니 하더니 계엄군 천지가 되었다. 영원할 것 같던 권력의 핵심이 사라지자 무주공산처럼 비틀대다가 신군부에게 힘이 넘어갔다. 대학생들은 끝까지 민주화를 주창하며 최루탄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급기야 대학은 강의도 시험도 없는 개점휴업 상태가 되었지만 리포트로 성적을 주고 장학금을 주었다. 그 와중에도 권력을 잡겠다고 분주하게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세력을 키워가는 무리도 있었다. 또 다른 마그마가 열기를 더하며 부글거렸다.
불안한 기운이 가득한 병영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바깥세상과 격리된 부대원은 통제된 매스컴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자세한 내막도 모른 채 실전 같은 긴급 출동과 사격 연습을 밤낮없이 계속했다. 언제든 출동할 수 있도록 짐을 싸 놓고 총을 메고 철모를 쓴 단독군장으로 다녔다. 사무실 서류도 후송할 것과 파기할 것을 분류해놓고 비상상태에서 일했다. 점차 높은 단계의 비상이 발령되었고 곧 전쟁이 터질 것만 같았다. 불안한 마음에도 전쟁이 터지면 군인이 가장 안전하다는 자조적인 농담을 주고받았다.
처음 만난 장소는 서울역 다방이었다.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외출이 막 허용되던 가을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군 생활도 종착역을 향하던 때라 내무반 동기가 마련해준 외출증을 들고 서울로 나갔다. 겨우 찾은 다방에는 많은 사람이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노란 목도리를 두른 아가씨는 보이지 않았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성냥과 재떨이가 놓여있는 탁자에는 시키지도 않은 엽차가 잽싸게 자리 잡았다. 한 번 더 복장을 확인하고 입구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장계현의 나의 이십 년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무반 회식 때마다 어느 선임이 줄기차게 부르던 노래였다. 저녁마다 매타작 소리가 울려 퍼지는 내무반이었지만 가끔은 회식을 통해 쌓였던 울분을 토해내기도 했다. 그렇다고 선을 넘었다가는 회식은 바로 끝났다. 기분 좋게 마셨던 술 냄새가 다 빠져나갈 정도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왕고참이라 평소에 하고 싶었던 그림 연습을 하고 있었다. 목수 출신 방위병과 틈틈이 액자도 만들었다.
작은 가방을 둘러맨 노란 목도리의 아가씨가 문에 들어섰다. 한눈에 알아보고 손을 들자 해맑은 얼굴의 아가씨는 가슴에 붙은 명찰을 확인했는지 생긋 웃으며 인사부터 한다. 학교에 근무해서 그런지 나이보다는 훨씬 성숙한 모습이었다. 군대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소리와 그림 이야기를 하면서 공감대를 넓혀갔다. 친구의 말만 믿고 주저 없이 나갔는데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잘 이어졌다. 두 살 적은 아가씨는 다방 문을 나서면서 오빠라 불렀다. 여동생이 없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그 호칭을 듣는 순간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토생전은 별주부전이다. 생소한 마당극을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렜다. 기껏해야 동네 걸립 노는 것을 본 것이 전부였던 나는 기대가 컸다. 마당극을 극장에서 공연하지 않던 시절이라 더 그랬다. 풍물놀이야 엄마 등에 업혔을 때부터 봐왔지만 마당극은 전혀 다른 장르였다. 대학 축제 때마다 장구와 꽹과리를 친 적이 있던 터라 관심이 많던 분야였다.
드디어 토생전이 시작되었다. 경쾌한 장단과 익살스러운 연기에 모두가 젖어들었다.. 창극이나 판소리처럼 지루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관중들과 호흡을 같이 하는 공연이라 나도 배우가 된 것 같았다. 가끔 양념같이 더해지는 재치 있는 애드리브가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칼칼한 목소리로 충청도 사투리를 많이 구사하는 배우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평소 잘 웃지 않던 나는 그날 많이도 웃고 떠들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방금 본 것처럼 기억이 생생하다. 극장을 나와 덕수궁 미술관 국전도 같이 보러 갔다. 그녀와는 그해 겨울에 몇 번 더 연극과 그림을 보러 다녔다.
세월이 한참 지나 혼자 세실극장을 찾았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보러 갔지만 채 끝나기도 전에 조용히 나왔다. 그날도 하늘에는 흰 구름이 떠다녔지만 고궁에는 국전이 열리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기억 속의 그날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누구나 젊은 시절의 기억은 소중하다. 사람은 기억을 먹고 늙어가기 때문이다. 봄날 아지랑이처럼 가끔 지난날 기억이 피어났다 사라지면 혼자 쓴웃음을 짓는다. 말할 수 없어 더 그립고 다시 올 수 없는 날이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세실극장이 문을 다시 열었다. 가을이 되면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볼까 한다. 풋사과 같은 기억이 구름처럼 떠다니는 하늘이 점점 높아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