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의 노래 / 성의제
달그락, 달그락….
그대의 건강을 위한 노랫소리
그대의 건강을 기원하는 기도소리
달그락, 달그락….
주머니 속 손아귀 안에서 굴러다니며 마찰하는 가래 부딪히는 소리.
어려서 어른들이 손안에 쥐고 주무르는 두 개의 가래 소리를 들으며 신기한 눈으로 본 적이 있다. 가래는 호두 비슷한 것으로 거무튀튀한 두꺼운 내과피內果皮속에 떫은맛이 나는 살이 조금 있는 견과류로 호두의 4촌이나 6촌쯤 되는 놈이다. 호두의 껍질이 단단하기는 하지만 약간 힘을 가하면 쉽게 부서지는데 반해 가래는 차돌같이 단단해서 여간해서는 깨지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약용으로도 쓰인다는데 특히 가래 열매의 기름은 비싼 편에 속한다. 일명 추자楸子라고도 부른다.
칸트는 손은 외부의 뇌라는 말을 남겼다. 손은 우리 몸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가래나 호두를 손안에서 굴리면 손바닥이나 그 밖의 근육들을 이용해 손끝의 말초 신경이 자극되어 혈액순환을 왕성하게 해 준다. 또 신경의 정상적인 활동을 촉진하고 피로 회복, 수전증, 치매 예방, 스트레스 해소 등의 효과가 있다.
아침 산책길가에 가래나무가 한 그루가 있었다. 꽤 많은 열매를 매달고 있다가 가을이 되자 그 열매가 영글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 둘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산책할 때마다 주워 모은 것이 꽤나 많았다. 가래 열매의 외피는 자연히 벗어지기도 하지만 속껍질의 섬유질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하루나 이틀 물에 불렸다가 헌 칫솔로 문질러 닦아내려면 좀 수고스러운 작업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손질이 끝난 가래열매가 수 십 개가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문우文友들에게 선물해야겠다고 가지고 가니 모두들 반기며 두어 개 씩 가져갔다. 동창생 하나가 가벼운 수전증을 앓고 있기에 선물해 주기도 했다.
여행을 하다가 K시에서 자고 일어나 식당을 찾아 나섰다. 낯선 고장이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상가도 맛집 골목도 큰길가도 아닌 뒷골목, 그것도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눈에 띤 허름한 식당의 간판이 ‘깍두기식당’이었다. 살짝 호기심이 발동하는 좀 이상야릇한 느낌을 주는 상호였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들어갔는데 여느 음식점과는 분위기가 색달랐다. 사방 벽에 여러 사람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가족들 사진은 아닌 듯해서 무슨 스토리텔링이 있는 식당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중앙에 공기 밥은 무한 리필이라고 쓴 큰 글씨도 보였다. 다른 식당에서는 대개 한 그릇 추가에 1,000원을 더 받는다고 되어있다. 나는 짓궂은 농담을 즐기는 편이라 운동선수들이나 일꾼들이 오면 세 그릇, 다섯 그릇도 먹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렇게 주다보면 손해 아니냐고 했더니 까짓 것 벌면 얼마나 더 벌겠다고 돈을 더 받겠느냐, 내 집에 오신 손님 배불리 먹고 가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일행을 챙겨주며 계속 손전화의 화면에 눈길을 주기에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더니 90이 넘은 아버지가 일어나실 시간이 지났는데도 동정이 없어 무슨 일인가 궁금하고 걱정이 돼서 그런다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가래 두 개를 꺼내 아버지께 드려 운동하시게 하라고 했더니 자기도 가래가 많다며 상자에 담긴 것을 들고 나왔다. 사연인즉, 자기 집 마당에 가래나무가 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가을에 주워 모아 두었다가 예의 손질을 끝내면, 아버지께 용돈을 드리는 셈으로 그 가래를 20만원 어치, 또는 30만원 어치를 사다가 식당에 들르는 노인들에게 선물 한다는 것이다.
뜻밖에 낯선 도시의 뒷골목에서 이런 인연으로 동지를 하나 만나게 되었다. 간판이 깍두기식당인데 왜 깍두기가 식탁에 없느냐고 물었더니 무를 잘못 샀는지 깍두기 맛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안 내놓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갈하고 인정 많은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나오며 생각했다. 세상은 그래도 살맛이 나는구나!
며칠 뒤에 휴대전화 검색을 하다가 마침 그 집의 전화번호가 뜨기에 전화를 걸어 며칠 전에 아침 식사를 했던 영감이라고 밝혔더니 기억이 난다고 했다. 따로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인상이 깊은 효녀를 발견했으니 K시 시장님께 효녀로 표창해 달라고 추천하고 싶다고 하니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도리인데 그게 무슨 상 받을 일이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버지가 아들만 위하고 자기는 계집애라고 일만 시켜서 구박덩어리로 자랐다는 그 딸이 커서 아들보다 몇 십 배 큰 효도로 모시는 것을 보면서 딸 없는 내 노후의 신세가 살짝 처량하고 불쌍하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시제時祭를 모시기 위해 간 고향 길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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